4월 최장무 '장군'님과의 회원 인터뷰

7월 17일 업데이트됨


아디의 회원 중에는 인권/국제개발 분야에 종사하시지 않더라도 아디를 후원을 해 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 온라인 줌 화상을 통해 인터뷰로 만나뵌 ‘장군’ 님도 그런 분 중 한 분이신데요. 장군님은 8년 째 석유 프로젝트에 파견근무자로 이라크에서 생활 중이신 아디 신입회원 이십니다. 장군님이 오랜 시간 동안 해외 생활을 하며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진솔한 나눔을 담은 인터뷰 내용입니다.

Q) 안녕하세요, 장군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A) 안녕하세요, 저는 중동에서 8년째 살고 있는데요. 우즈베키스탄에서 3년을 지냈고, 이라크에서는 5년 째 생활하는 중입니다. 카르발라 라는 지역의 정유공장 프로젝트의 파견근무자로 한국인과 현지인,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2만 명의 해외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시설 관리를 맡고 있어요.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직원들이 이용하는 국가별 식당을 관리하고 먹고, 사용하는 물과 폐수처리시설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제가 사무실 관리라든가 다른 일들도 맡았었는데 점점 한국에서 매니저 분들이 오게 되면서 지금은 세분화해서 일을 분담하는 중이에요.

Q) 현지의 코로나 상황은 어떤가요? 특별히 힘든 지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점인가요?

6주 째 통행금지 중이에요. 통행증이 필요한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이동도 허용이 안 되고 있어요 제가 지내는 시설은 외부와 떨어진 사막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식자재 관계된 차량 외에는 통행이 금지되었고, 엄격한 통제로 인하여 가능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라크는 이란 옆에 위치해 있어서 처음 이란에 코로나19가 크게 번졌을 때 이라크도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언론은 확진자 숫자가 1,400-1,500명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아요. 이미 죽은 사람들이 많은데, 산 사람을 검사할 키트도 모자란 상황에서 죽은 사람들을 검사할 수가 없다 보니 사망률 집계에 잡히지 않은 것뿐이죠. 현지사람들도 실제로는 3-4배 더 높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는 공항도 폐쇄 되어서, 사실 저 같은 한국인들은 불안감이 좀 있죠.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린다고 해도 이 나라를 떠날 방법이 없거든요.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의 ‘아프지 말자’ 라는 노랫말 가사(웃음)처럼 아프지 않아야 하고, 아프다 하더라도 참아야 하는 상황이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이걸 걱정하기는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주까지 한국에서 휴가였을 텐데, 아예 나가지를 못하고 있는 중이죠.

Q) 이라크의 일상에서 우리나라 사회와 조금 다르다고 느끼시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해요.

이전 근무 지역이었던 우즈베키스탄도 마찬가지지만 노동자 중에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분들이 많아요. 이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느끼는 게 많죠. 이 분들은 고국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큰 아파트 같은 건물은 없지만, 가족 간의 화목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저는 이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돈을 벌기 때문에 제가 더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 분들이 여기에서 버는 돈은 한 달에 평균 300-400불로 고국에서 일하는 것 보다 3-4배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요. 여기에서 3년정도 일을 하고 돌아가면 고국에서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정도이죠. 이 분들에게는 굉장히 많은 돈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저는 이 분들은 여기에 만족할 줄 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한국 사람이라면 1만 불을 벌고 있다고 해도 2만 불을 벌려고, 또 더 많이 벌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만족을 느끼기가 어려울 텐데, 이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런 금전적 욕심이 덜 느껴져요. ‘우리가족이 매끼 굶지 않고 하루에 3끼를 먹을 수 있다’에서 가지는 행복감이 우리와 좀 다른 것 같아요. 물론 이 분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인 여유에 대한 혜택은 없을지 몰라도, 간단한 의식주를 해결 할 수 있어서 행복함을 느낀다는 부분들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선진국 쪽으로 향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이 분들을 통해 행복에 대해 다른 의문을 가져보게 되는 거 같아요.

Q)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동국가나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서 가지는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들이 있는데요, 중동에서 생활하시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게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슬림에 대해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죠.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사들이 무슬림 무장세력 집단에 의해 납치 되고 피살되는 뉴스만 보고 ‘무슬림은 눈만 빼놓고 얼굴을 모두 가린 채 폐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만나보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한 번은 IS 테러리스트 집단에 의해 살해를 당한 사촌을 둔 이라크 직원이랑 이야기를 했는데, 테러리스트/무장세력 집단과 무슬림은 엄연히 다르다고 이야기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무슬림들이 눈만 내놓는다던 지, 복면을 쓰는 이유가, 자기의 모습을 노출 안 시키고 숨어서 나쁜 걸 하려고 그런다고 잘못 생각하는데, 사실 여기 기후와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여기는 모래바람이 일단 많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모래가 불어서 얼굴이 상하게 되고 따갑죠. 겨울에는 영상 1도까지 내려가는 가하면 여름에는 약 1주일 정도 온도가 50도 이상에서 유지될 때가 있어요. 이렇게 뜨거울 때 얼굴을 감싸는 건 더위예방에 도움이 되거든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나쁜 놈들이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순수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기독교입니다. 하지만 제 종교를 떠나서, 저는 모든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예전에 비하면 그 농도가 많이 퇴색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무조건 종교적으로 무얼 해야 한다고 지도자가 이야기하면, 신자들이 다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아요. 여기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처음에 중동에 왔을 때 하루에 5번 절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 노동자가 다 그러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진짜 이슬람 믿는 거 맞아요?’ 라고 물어볼 때도 있어요. (웃음). 힌두교가 소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도 별로 일관성이 없고요. (시설 내)인도식당에는 힌두교들을 배려해서 채식과 비-채식 코너가 분리되어 있지만 채식코너 이용자 숫자가 하루는 천 명이었다가 하루는 천오백 명이었다가 그래요. 입으로는 힌두교를 믿는다, 무슬림이 다고 이야기 하지만 모두가 종교적인 의식을 따르지는 않는걸 보면, 전 이런 생각이 들어요. 꼭 신앙의 진정성이 떨어진 거라기보다는, 세대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이 개방적 문화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활태도에도 그런 게 반영된다고 생각해요. 외부에 어떻게 비춰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 생각하면 이 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한 거 같아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종교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죠.

Q) 이라크 분들은 한국 사람과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고 하셨는데요,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저는 우리가 행복을 바라보는 척도와 이 분들이 행복을 바라보는 척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8년 전 처음 왔을 때에는 제 기준으로 이 사람들의 업무능력을 평가했었어요. 일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감정이 있다 보니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에게 ‘어떻게 이것도 모르면서 이 나라까지 왔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들었던 생각이 있어요. 제가 89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 회사에 취직을 했을 때 급여가 30만원 조금 넘었는데, 그 월급을 이 분들이 여기서 받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30년은 저에게 한참 오래된 세월인데, 그 당시는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사우디에 노동자로 근로자로 와서 월급 근로 노동자로 와서 1년에 1번이나 2년에 한 번씩 한국으로 휴가를 오거나 한국으로 송금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 때를 생각하며 확 깨달은 게 있었죠. 그 분들이 처한 상황과 내가 처한 상황이 맥락이 다른데, 그런 걸 고려하지 않고 내가 이 분들을 판단 한다면 ‘오류가 있을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러고 나니까 기대를 내려놓게 되었고, 일이 너무 쉬워졌어요. 제가 상대방을 이해하니 그 쪽도 저를 이해하게 되었고, 지금은 서로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고 느껴요. 이건 제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제가 눈높이를 조정해서 편해졌다고 봐야죠.

Q) 아디를 후원하시는 장군님이 꿈꾸는 변화된 세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종교인기기는 하지만 종교를 갖기 전부터 원래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4남 1녀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일을 많이 도왔고, 그 때는 살기 힘들어서 그런 게 일반적이었죠. 전 베이비 붐 세대의 사람이라, 누구를 돕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자라기도 한 것 같아요. 길 가다가도 어르신이 무거운 걸 들고 가는 걸 보면, 제가 가는 길의 반대방향이라도 멈추어서 거들고 다시 길을 가는 편이거든요.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신앙인의 의무라고도 생각합니다. 물론 의미가 많이 변질 된 면도 있지만, 아내와 계획하기를 앞으로 사회에서 직장인의 역할을 더 이상 못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받은 혜택을 어렵고 교육 못 받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인류)가 한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이상 장소를 떠나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 동참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불쌍해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그 사람들이 태어난 상황이 힘들다는 걸 이해하면서 후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신입 후원으로서 아디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요?

전 아디라는 단체를 전혀 몰랐었어요. NGO라고 소개를 받아서, 전 세계적으로 많이 도와주는 활동을 펼칠 거라고 기대했는데, 홈페이지에 가보니 규모가 많이 작아 보이더라고요. 동시에 제가 놀랐던 부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NGO의 역할을 실천하고 계신다는 점이었어요. 단순히 우물파고, 건물 짓고, 물품 제공하는, 그런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고려해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에 맞추어 지원 사업을 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이고 필요한 접근이라고 느껴요. 이런 부분들을 주위사람들이 알아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물질 지원이나 의료 지원도 좋지만 가장 기본적인 인권의 존엄에 초점을 맞추는, ‘아시아의 인권을 위해 동행하는 단체’로서 아디의 일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가 되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장군’이라는 닉네임은 어떻게 갖게 되셨나요?

전 장군다운 생각을 하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해요. 전투만 잘하는 장군이 아니라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명장의 모습이요. 저는 과거에 태어났다면 명장이었을 거 같습니다! (웃음).

아디의 <회원과의 인터뷰>에 응해주신 장군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해외에서 건강 유념하시기를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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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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