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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신지영 회원님과의 인터뷰

아디를 항상 응원해주시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글에서는 아디의 회원이자 신임이사 역할을 맡게 된 ‘바라’(별칭)에 대해 소개를 해드리려고 해요. 


바라는 지난 10년 동안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식민지기 및 1945년 직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학 사상을 연구하며 여러 사회 활동에 참여하다가 지난 3월에 귀국했어요. 현재는 연세대학교에서 1945년 전후의 한국과 동아시아의 기록문학을 연구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활동가와 연구자가 함께 모여 공부하고 활동하는 <난민X현장(RefugeeXField)>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람: 바보 같은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학창시절부터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식민지 문학에 특별한 관심이 계속 있으셨어요?


바라: 글쎄요. 저는 되게 숫기가 없는 편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에요. 대학 때도 일부러 사람들 안 다니는 길로 다니고 그랬어요. (웃음) 지금은 많이 노력해서 나아진 거죠. 그러다보니 눈에 띄는 것보다는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곤 했어요.

그 당시 ‘썰렁하다’는 말이 유행어였는데 저는 그 말이 너무 싫었어요. 왜냐면 제가 진짜 썰렁한 사람이었거든요. (웃음) 썰렁하다는 말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말이잖아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늘 썰렁하다고 놀림을 받는 선배가 있었어요. 어떤 권위적인 복학생 선배가 그 사람만 보면 썰렁하다고 놀렸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웃으면 ‘사람들이 왜 웃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상황이 너무 싫어서 펑펑 운 적도 있어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은 무엇일지 항상 궁금했어요. 썰렁하다고 놀림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 담아 놓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사회학이 아니라 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 같아요. 문학 안에서도 역사와 사상은 계속 공부했는데, 역사는 문학 속 세계를 명징하게 판단하게 해 주었고, 사상은 문학 속 세계의 외부를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식민주의의 폭력과 지배의 문제, 그리고 식민지 안에서도 복잡하게 갈등하는 식민지 속 마이너리티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어요.


가람: 지영님도 말하지 못한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에 문학을 통해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군요.


바라: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구나 와서 말할 수 있는 공간에도 마음이 많이 갔어요. 대학교 때는 걸개 동아리 활동을 했었어요. 예쁜 정물화를 그리는 동아리들도 있었는데 그쪽으로는 마음이 가지 않았고, 걸개 그리고 판화 만드는 동아리를 찾아 갔고 정말 좋은 친구들을 얻게 되었어요. 그때 가장 행복했던 경험은 친구들과 함께 걸개를 그리던 거예요. 옥상에 6M*6M 크기의 천을 펼쳐두고 흰색 페이트로 빽칠을 하고, 그 위에서 뒹굴면서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거든요. 때로는 노동조합의 부탁으로 전태일 열사 등을 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가 대학 다니던 때는 학생운동이 쇠퇴하던 시기라서 동아리에 선배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마추어였던 친구들과 그리고 싶은 것을 그야말로 멋대로 그렸어요. 함께 거대한 걸개를 그린다는 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에요. 뭘 그리느냐가 아니라 함께 한다는 게 중요했어요. 수업 갔다가 오면 누가 내가 그린 그림 위에 다른 걸 그려놔요. 내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이 되어 있는 거죠. 처음엔 그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근데 한편 편안하기도 한 거예요. 그게 훨씬 좋고 보기에도 예뻐요. 그렇게 걸개 위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불렀다가 토론도 하곤 했어요. 그게 저에게는 어쩌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소중한 코뮌의 경험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학교 밖의 모임이나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수유+너머라는 연구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죠. 수유+너머에서는 한 10년 정도 깊숙이 쑥 들어가서 활동했어요. 1900년대 신문부터 최근의 사회과학 이론이나 철학까지 닥치는대로 많이 읽고 세미나하고 강의하고 온갖 잡글을 쓰면서 보냈는데, 사실 공부나 강의보다 청소하고 밥하고 카페하고 손님들 맞이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하면서 보낸 시간이 더 길 거예요. 저에게 공부의 첫걸음을 알려준 곳이면서 동시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깊이 경험하게 해 준 곳이에요. 일본에 가서도 해외 통신원으로 매달 글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보내게 되었죠. 그런데 더 이상 글을 보내지 않아도 된 순간에도, 또 수유+너머가 분열되던 순간에도,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이어가게 되었어요. 학술적인 장에서 쓰는 글이 아니라, 활동에 참여하면서 썼어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 재일조선인 운동, 2011년 원전 사고, 지진 쓰나미 후 탈원전 반원전 활동으로 넘쳐났던 거리의 모습들을 글로 쓰고, 홈리스 운동, 특히 여성 홈리스들과 함께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친해지기도 했죠.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고 길을 느끼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저에게는 마치 숨구멍 같았어요. 그런 만남이 없었다면 일본에서 오래 못 버텼을 것 같아요. ‘이방인’인 제가 불쑥 찾아가도 꾸준히 참여하지 못해도, 늘 따뜻하게 문을 열어주고, 열정적으로 또 다른 삶과 세계를 꿈꾸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도록 생각과 활동을 나눠 주었던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늘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그 인연들에 마음 깊이 감사해요.


가람: 아까 말씀하셨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결국 노숙자, 재일조선인, 지진 쓰나미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그리고 난민들과도 연결될 수 있을까요?


바라: 네 그렇죠. 늘 누구나 다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잖아요, 마이너한 부분들을. 지금 저희 <난민X현장>에서 함께 고민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난민과 난민화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난민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다’라고 얘기해버리면, 난민은 나와 구별된 대상이 되어 버리고 대상화되고, 동정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나’의 어떤 부분은 ‘난민화’되어 있고, 내 주변에는 난민화되어가는 존재들이 많이 있어요. 굳이 성소수자, 장애인, 동물, 노인 등의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말이죠. 또 난민화된 상태는 결코 하나의 정형화된 이름으로 불릴 수 없지요. 따라서 ‘내가 바로 난민이다’라는 말은 선언이자 요청이 되지요.


그러나 <난민X현장>에서 모두 함께 고민하고 있는 것은, 국적이 없는 ‘난민’의 삶의 조건과 ‘난민화된 존재’의 삶의 조건이 갖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에요. 이 좁힐 수 없는 간극 속에서 난민과 난민화의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싶고 이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정말 섬세하고 날카롭고 용감한 좋은 친구들과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가람님의 말씀처럼 난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삶을 고민하는 거지 뭔가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을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노들야학에 처음 갔을 때, 그곳 창문에 씌어 있던 말을 늘 기억하고 있어요. 멕시코 치아파스 어느 원주민 여성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만,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난민과 난민화라는 고민은 이 말과 연결됩니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동물 등 계속해서 난민화되어가는 존재들이 있을 뿐 아니라, 난민들 안에도 성소수자가 있고 여성이 있고 아이가 있고 신체적 정신적 장애나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도 있잖아요. 또한 그 각각의 고통은 ‘우리’, 그러나 나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내재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가람: 지금 하고 계신 난민현장 <Refugee*Field> 프로젝트도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되었나요?


바라: 네. <난민X현장> 팀의 가장 큰 특징은 난민을 둘러싼 상황에 관심 있는 연구자와, 연구에 관심 있는 활동가가 함께 모여 이야기한다는 것이에요. 지금은 이를 예술이나 다른 매체로 표현하는 분도 함께 하게 되었어요. 사실 공부하는 장에만 있으면 보지 못하는 지점이 계속 생겨요. 대학의 공부가 점점 더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멀어지고 있는 게 최근의 현실이죠. 대학이 사회의 공론장을 주도하던 시기에서, 사회의 공론장의 이슈를 대학이 배우고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학교 밖의 코뮌, 사회활동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정말 많고 또 그런 활동을 통해서 깊은 우정을 맺게 됩니다. 연구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활동가 분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최근의 활동가 분들은 연구자보다 훨씬 더 많이 깊게 빠르게 공부하고 계신 분이 정말 많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활동가 분들은 늘 시급한 문제들이 닥쳐오니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찾아보고 글을 쓸 시간은 연구자에 비해 현실적으로 부족하죠. 그래서 ‘연구활동가’라고 할까요, ‘활동연구자’라고 할까요, 그런 관계로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게 저에겐 중요했어요.


 가람: 난민X현장 프로젝트 팀에서 어떤 내용들이 논의되었는지 궁금해요.


바라: 매달 세미나를 하면서 난민에 관련된 최근 상황을 다른 여러 마이너리티의 역사, 사상, 표현과 연결시키고 있어요. 대외적인 활동으로는 <사회인문학포럼 Teach-in> 이라는 공론장을 여는 것입니다.


Teach-in이란 형식은 일본에서 참여했던 <티치인 오키나와 (Teach-in Okinawa)>라는 활동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원래 Teach-in을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대학이 민감한 사회문제에 대해 시민사회와 토론하는 장을 여는 것인데요, 1960~70년대 일본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확산될 때 티치인이라는 방식이 확산되었고, 동시에 배우고 가르치는 권력관계가 역전되었어요. 즉 대학이 알려주고 시민사회가 배우며 토론하는 게 아니라, 나이도 학식도 성별도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의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 밤새 토론하는 문화가 형성되었어요. 60대 노교수랑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밤새 토론하고 그러는 거죠. 저희 난민X현장 팀도 같은 방식의 토론을 해보려고 했어요. 아직 이 방식을 충분히 성공적으로 시도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만, 일반적인 강연이나 학술행사가 아니라, 토론시간을 길게 늘이고 사회자를 두고 참여해 준 청중과 강연자가 같이 토론하는 장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첫 번째 티치인의 주제는 <신인종주의와 난민>이었고, 두 번째 티치인 주제가 <로힝야 난민이야기>였어요. 아디와 직접 관계를 맺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김기남 변호사님의 발표도 좋았고, 무엇보다 청중으로 참여하신 분들이 좋은 질문과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어요. 자신이 로힝야 난민들에게 공감한다고 하면, 그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져 고통스럽다면서 운 친구도 있었고, 로힝야 집단 학살은 먼 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공감해 준 분도 있었죠. 한 청중은 아디의 김기남 선생님이나 ‘우리’들의 역할이 마치 보부상 같다고 했어요. 아디는 우리에게 로힝야 난민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을 들은 ‘우리’는 토론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다시 이 이야기를 또 다른 이들에게 들려줄 테니까, 마치 이야기를 전달하고 다니는 보부상과 같다는 것이죠.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매우 기뻤어요. 사실 로힝야 난민에 대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반응해 줄 수 있을지 팀원 내에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뜨거운 장이 됐어요.


<난민X현장> 팀으로서는요, 난민캠프에 있는 난민과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안온한 자리의 명백한 차이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고민에 공감해 주신 분들이 많아서 정말 기뻤어요. 홍보 포스터를 만들 때 로힝야 난민의 얼굴이 드러난 사진을 사용할지 말지, ‘난민’이라는 단어를 쓸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카톡으로 몇 시간 동안 얘기했거든요. 스테레오타입화된 ‘난민’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난민캠프나 로힝야 생존자들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또 논의했는데요, 이렇게 노력하면 ‘우리’의 생각이 사람들 마음에 가 닿기도 하는구나 라고 느꼈어요. 


가람: 너무 멋져요~! 앞으로도 지영님과 난민현장 팀원들의 난민화에 대한 고민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시민들의 마음에도 닿게 될 거라 믿어요. 아디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바라: 여전히 로힝야 난민분들, 혹은 생존자분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과연 ‘우리’의 작업이 로힝야 난민분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또 ‘우리’는 로힝야의 고통스런 상황과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게 됩니다.


저희 <난민X현장>의 많은 멤버들은, 이번에 로힝야의 상황을 아디를 통해 알게 되고 공부하면서, 점차 넓어지고 깊어져 갈 수 있었어요. 물론 부담도 있었지만요. 하지만 목숨을 걸고 로힝야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그 고통과 마주하며 매일의 삶을 꾸려가는 분들에게 우리의 작업은 너무나 안온한 곳에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면 아득해져요. 난민과 난민화의 문제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간극이 극복될 수 없는 ‘거리’로 존재하지요. 그 간극에 절망해서도 안 되지만, 그 간극에 눈 감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아디의 여러 활동가분들이 ‘우리’를 가장 멀리까지 고민하게 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저는 아디의 이사라는 직분도 <난민X현장> 팀으로서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러고 싶어요. 저희 <난민X현장> 팀은 12월까지 첫 번째로 생각했던 ‘난민과 난민화’라는 화두를 일단 마무리하고, 이후 주제와 구성원을 새롭게 해보려고 고민중에 있습니다.


<난민X현장>이 아디를 통해 로힝야를 알게 된 만큼, 어떻게 로힝야 난민들, 그 중에서도 다시금 난민화되어가고 있는 분들(여성, 장애인, 아이 등)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또 그분들의 증언과 경험을 전달하는 윤리적인 방법이란 무엇일까 등을 아디와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참, 가람님과는 거의 첫 만남이나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가람님 덕분에 편안히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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