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의 여름(하)
스리랑카 자프나(Jaffna)와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에서
정혜진(토리)
프롤로그

▲ 빅토리아 파크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혜진
수업이 끝난 어느 날, A가 내게 와 타밀어로 ‘안녕하세요?’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말하니 ‘와나꿈’이란다. 싱할라어(‘아유보완’)와 전혀 다른 발음의 인사말. 그 이후 A는 번번이 내게 와 타밀어 인사말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이 기관에 들어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물을 기회가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폭력에 노출된 상황과는 별개로) 진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는 등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소수의 친구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려서부터 차밭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타밀족’이라고 말했다.
스리랑카는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족(불교)과 18%의 타밀족(힌두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종족 사이의 내전(1983~2009)은 역시나 영국 식민 지배 전략의 일부인 분할통치의 결과물이다. 내전은 2009년 싱할라족으로 구성된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UN에 따르며, 26년여에 걸친 내전으로 타밀족은 최소 8만 명에서 10만 명가량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내전 종식으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내가 만난 모든 싱할라족은 “더 이상 (종족 간에) 갈등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타밀족은 “괜찮아졌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한 겨울의 여름: 스리랑카 자프나(Jaffna)에서

▲ 자프나 엘레펀트 패스(Jaffna Elephant pass) ⓒ혜진
갈레(Galle)에서 콜롬보(Colombo)로, 콜롬보에서 스리랑카 최북단에 있는 자프나(Jaffna)로의 이동은 장작 10시간 이상이 걸린다. 스리랑카는 대한민국 영토의 2/3 규모이지만 좋지 않은 도로 사정으로 대개 어디를 가든 6시간은 잡고 가야 한다. 밤새 달리는 버스를 타고 먼동이 틀 무렵 자프나에 도착했다. 그곳은 스리랑카 내전의 격전지, 소수민족 타밀족의 주 거주지, 스리랑카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자프나였다. 여명에 비친 거리의 표지판과 간판들은 싱할라어와 전혀 다른 모양새의 타밀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 자프나 엘레펀트 패스 메모리얼(Jaffna Elephant pass memorial) ⓒ혜진
엘레펀트 패스(Elephant pass:스리랑카 주도와 북부를 잇는 통로로 과거 스리랑카 코끼리를 인도로 수출하는 유일한 통행로였다.)에서 내리자마자 무장한 몇몇 군인들과 ‘TOGETHER WE REACH UNITY IN DIVERSITY’라는 팻말이 보였다. 군인이 내게 다가와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이곳이 나의 목적지라고 말하니, 자신들이 설명해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따라나섰다. 그곳은 엘레펀트 패스 메모리얼(Elephant pass memorial), 타밀 반군(LTTE: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을 ‘물리친’ 스리랑카 정부군(‘국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의 ‘승전 기념비’가 있는 곳이었다. 내전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분열을 일으킨 선동자가 LTTE이며 이들에 대항해 승리한 정부군을 향해 찬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정부군에 의해 스리랑카가 '통합'되었으며, '조화'를 이루었고 지금의 '평화적 상태'가 되었다는 식이다.)

▲ 하살라카 가미니(Hasalaka Gamini) 기념관 ⓒ혜진
메모리얼 옆에는 승전에 일등공신이었던 정부군 하살라카 가미니(Hasalaka Gamini)를 기리는 기념관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은 비가 참 억수같이 내렸다. 설명을 끝낸 군인이 장대비에 자신의 소리가 묻힐 새라 큰 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기 참 평화롭지?’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 스리랑카 내전 타밀족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및 내전 관련 전시 포스터_자프나대학교 ⓒ혜진
물론 자프나에 ‘승전 기념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는 자프나 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다. 캠퍼스를 거닐다 어느 한 귀퉁이에 여러 손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조각상을 발견했다. 타밀 희생자 추모비. 몇 해 전, 대학 측으로부터 이 추모비를 철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를 막은 건 역시나 자프나 대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렇다, 세상 어디서나, 우리는 누군가의 치기 어린 젊음 덕분에, 그 마음에 빚져서 이만큼 살고 있다. 캠퍼스 곳곳에는 생존자 증언과 증거자료를 전시한 행사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포스터를 구글 번역기로 돌리니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 내전이 아닌 학살이었다.
한 겨울의 여름: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에서


▲ 스리랑카 콜롬보역 (좌) / 기차 내부에서 외부전경을 보며 누와라엘리야로 향하고 있다. (우) ⓒ혜진
콜롬보에서 출발한 산악기차를 4시간여쯤 타고나니, 오른쪽 시야로 넓디넓은 차밭이 펼쳐졌다. 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찻잎을 따는 사람들도 보인다. 낭만적인 풍경. 기차의 출입문에는 인증샷을 남기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시속 20km로 달리는 오래된 산악 열차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드넓게 펼쳐진 차밭 풍경을 바라보는 일, 지금 생각해도 스리랑카 여행 중 단연 최고의 장면이었다.
누와라엘리야는 스리랑카 중부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스리랑카에서 긴 팔의 후드티를 입고도 춥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 덕분에 그곳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시대부터 품질 좋은 차(홍차, 녹차, 백차)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그러니까 실론티, 실론티가 그곳에서 생산된다.
▲ 누와라엘리야에 위치한 담로 티 팩토리(Damro Tea Factory) ⓒ혜진
담로 티 팩토리(스리랑카 최대 규모의 차 공장)로 향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푸릇한 찻잎이 세계 최고의 실론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시음용 차도 주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관광객들뿐인 게 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의 유럽인들이 팔 할을 차지하고 나머지 이 할은 중국인, 일본인, 인도인, 그리고 우리, 한국인이었다.
누와라엘리야에서 여러 관광 코스를 돌며 우리를 안내해 줬던 툭툭이 기사님은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 아버지도 이곳에서 노역을 했던 분이었어요.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없이 일해야 했어요. 분노가 왜 없겠어요. 모두 말은 안 하지만 갖고 있죠. 그런데 저희가 말한다고 누가 듣나요. 여기서 노역했던 사람 대부분이 타밀족 출신이고, 저희 아버지도 타밀이었는걸요. 그냥 열심히 사는 거예요.”
▲ 찻잎을 수확 중인 타밀 여성 ⓒ혜진
차를 음미하는데, 차밭에서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찻잎을 따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와나꿈’, 타밀어 인사말을 알려준 아샤가 떠올랐다.
에필로그
내전 당시 싱할라족은 타밀족의 주 거주지인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로 싱할라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싱할라족 정착촌을 세웠다. 이는 타밀족을 억압하기 위한 차별 정책으로, 정부는 그들의 고유 언어와 문화, 종교를 억압하는 한편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음으로 교육, 선거, 출산, 생계 활동 등의 제약을 가했다.
“내전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형은 영국에 있고, 동생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죠. 어렸을 때, 우리 동네(자프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학교도 못 갔고요. 먹을 것도 녹록지 않았고, 동네를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죠. 정부군들이 들어와 괴롭혔어요. 물론 자프나를 가보셔서 알겠지만, 지금은 문제없어요. 학교에서도 싱할라어와 타밀어를 동시에 가르치기도 하고요. 많이 괜찮아졌죠. 얼마 전 총선에서, 자프나 지역 국회의원으로 타밀 정당 사람들이 뽑히기도 했고요.(총 6석 중 Ilankai Tamil Arasu Kadchi당과 All Ceylon Tamil Congress당이 한 자리씩 가져갔다.) 모두가 더 나아질 거라고 얘기해요. (중략) 근데도 여전히 타밀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하층민이거든요. 궂은일을 하고 대물림된 가난으로 더 빈곤하게 사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준비하고 있어요.”
내전 당시 어린 꼬마였던 택시 기사님은 세련된 영국식 영어로 자프나에서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가해자 중심의 해석과 목소리를 잃은 희생자, 문제 제기하지 않는 피해자.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타밀인들을 두고, 혹 내가 듣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지만, 역시나 완전한 화해에 가깝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 피해자 권리 회복,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는 너무 쉽게 힘을 잃지 않나. (본인들이 말하는) 다시금 반복되어선 안 될 역사라면, 그래서 세운 기념관이라면, 그것은 승리를 이끈 군인을 향한 찬미가 아니라 희생자를 향한 애도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쩐지 몇몇 장면들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미얀마 로힝야족과 티베트, 그러니까 스리랑카 안과 밖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스리랑카 내전 당시 타밀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자료 전시회(자프나대학교 주관) (좌)
/ 내전 당시 타밀 임시 정부였던 LTTE가 발급한 실제 차량 등록증 (우) ⓒ혜진
2009년 스리랑카 내전은 끝났지만, 역사에 대한 해석과 권리를 향한 투쟁이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역시나 그 중심부엔 20대 초, 중반의 청년들이 있고, 구석구석 애도의 공간들이 있다. 고증이 될 만한 자료가 있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기록이 있다. 오랜 애환 같은 것이 피해자(소수민족) 사이에 퍼져있지만, 아직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가 있다. '다 해결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소수의 목소리는 삶의 형태로, 표정으로, 그러니까 소거된 음의 형태로 발화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어떤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 콜롬보로 향하는 기차에서 외부 전경 ⓒ혜진
한 겨울의 여름(하)
스리랑카 자프나(Jaffna)와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에서
정혜진(토리)
프롤로그
▲ 빅토리아 파크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혜진
수업이 끝난 어느 날, A가 내게 와 타밀어로 ‘안녕하세요?’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말하니 ‘와나꿈’이란다. 싱할라어(‘아유보완’)와 전혀 다른 발음의 인사말. 그 이후 A는 번번이 내게 와 타밀어 인사말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이 기관에 들어오기 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물을 기회가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폭력에 노출된 상황과는 별개로) 진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는 등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소수의 친구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려서부터 차밭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타밀족’이라고 말했다.
스리랑카는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족(불교)과 18%의 타밀족(힌두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종족 사이의 내전(1983~2009)은 역시나 영국 식민 지배 전략의 일부인 분할통치의 결과물이다. 내전은 2009년 싱할라족으로 구성된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UN에 따르며, 26년여에 걸친 내전으로 타밀족은 최소 8만 명에서 10만 명가량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내전 종식으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내가 만난 모든 싱할라족은 “더 이상 (종족 간에) 갈등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타밀족은 “괜찮아졌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한 겨울의 여름: 스리랑카 자프나(Jaffna)에서
▲ 자프나 엘레펀트 패스(Jaffna Elephant pass) ⓒ혜진
갈레(Galle)에서 콜롬보(Colombo)로, 콜롬보에서 스리랑카 최북단에 있는 자프나(Jaffna)로의 이동은 장작 10시간 이상이 걸린다. 스리랑카는 대한민국 영토의 2/3 규모이지만 좋지 않은 도로 사정으로 대개 어디를 가든 6시간은 잡고 가야 한다. 밤새 달리는 버스를 타고 먼동이 틀 무렵 자프나에 도착했다. 그곳은 스리랑카 내전의 격전지, 소수민족 타밀족의 주 거주지, 스리랑카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자프나였다. 여명에 비친 거리의 표지판과 간판들은 싱할라어와 전혀 다른 모양새의 타밀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 자프나 엘레펀트 패스 메모리얼(Jaffna Elephant pass memorial) ⓒ혜진
엘레펀트 패스(Elephant pass:스리랑카 주도와 북부를 잇는 통로로 과거 스리랑카 코끼리를 인도로 수출하는 유일한 통행로였다.)에서 내리자마자 무장한 몇몇 군인들과 ‘TOGETHER WE REACH UNITY IN DIVERSITY’라는 팻말이 보였다. 군인이 내게 다가와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다. 이곳이 나의 목적지라고 말하니, 자신들이 설명해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따라나섰다. 그곳은 엘레펀트 패스 메모리얼(Elephant pass memorial), 타밀 반군(LTTE: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을 ‘물리친’ 스리랑카 정부군(‘국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의 ‘승전 기념비’가 있는 곳이었다. 내전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분열을 일으킨 선동자가 LTTE이며 이들에 대항해 승리한 정부군을 향해 찬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정부군에 의해 스리랑카가 '통합'되었으며, '조화'를 이루었고 지금의 '평화적 상태'가 되었다는 식이다.)
▲ 하살라카 가미니(Hasalaka Gamini) 기념관 ⓒ혜진
메모리얼 옆에는 승전에 일등공신이었던 정부군 하살라카 가미니(Hasalaka Gamini)를 기리는 기념관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은 비가 참 억수같이 내렸다. 설명을 끝낸 군인이 장대비에 자신의 소리가 묻힐 새라 큰 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기 참 평화롭지?’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 스리랑카 내전 타밀족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및 내전 관련 전시 포스터_자프나대학교 ⓒ혜진
물론 자프나에 ‘승전 기념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는 자프나 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다. 캠퍼스를 거닐다 어느 한 귀퉁이에 여러 손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조각상을 발견했다. 타밀 희생자 추모비. 몇 해 전, 대학 측으로부터 이 추모비를 철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를 막은 건 역시나 자프나 대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렇다, 세상 어디서나, 우리는 누군가의 치기 어린 젊음 덕분에, 그 마음에 빚져서 이만큼 살고 있다. 캠퍼스 곳곳에는 생존자 증언과 증거자료를 전시한 행사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포스터를 구글 번역기로 돌리니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학살, 내전이 아닌 학살이었다.
한 겨울의 여름: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에서
▲ 스리랑카 콜롬보역 (좌) / 기차 내부에서 외부전경을 보며 누와라엘리야로 향하고 있다. (우) ⓒ혜진
콜롬보에서 출발한 산악기차를 4시간여쯤 타고나니, 오른쪽 시야로 넓디넓은 차밭이 펼쳐졌다. 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찻잎을 따는 사람들도 보인다. 낭만적인 풍경. 기차의 출입문에는 인증샷을 남기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시속 20km로 달리는 오래된 산악 열차를 타고 바람을 맞으며 드넓게 펼쳐진 차밭 풍경을 바라보는 일, 지금 생각해도 스리랑카 여행 중 단연 최고의 장면이었다.
누와라엘리야는 스리랑카 중부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스리랑카에서 긴 팔의 후드티를 입고도 춥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 덕분에 그곳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시대부터 품질 좋은 차(홍차, 녹차, 백차)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그러니까 실론티, 실론티가 그곳에서 생산된다.
담로 티 팩토리(스리랑카 최대 규모의 차 공장)로 향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푸릇한 찻잎이 세계 최고의 실론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시음용 차도 주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관광객들뿐인 게 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의 유럽인들이 팔 할을 차지하고 나머지 이 할은 중국인, 일본인, 인도인, 그리고 우리, 한국인이었다.
누와라엘리야에서 여러 관광 코스를 돌며 우리를 안내해 줬던 툭툭이 기사님은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 아버지도 이곳에서 노역을 했던 분이었어요. 할당량을 채우려면 밤낮없이 일해야 했어요. 분노가 왜 없겠어요. 모두 말은 안 하지만 갖고 있죠. 그런데 저희가 말한다고 누가 듣나요. 여기서 노역했던 사람 대부분이 타밀족 출신이고, 저희 아버지도 타밀이었는걸요. 그냥 열심히 사는 거예요.”
차를 음미하는데, 차밭에서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찻잎을 따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와나꿈’, 타밀어 인사말을 알려준 아샤가 떠올랐다.
에필로그
내전 당시 싱할라족은 타밀족의 주 거주지인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로 싱할라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싱할라족 정착촌을 세웠다. 이는 타밀족을 억압하기 위한 차별 정책으로, 정부는 그들의 고유 언어와 문화, 종교를 억압하는 한편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음으로 교육, 선거, 출산, 생계 활동 등의 제약을 가했다.
“내전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형은 영국에 있고, 동생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죠. 어렸을 때, 우리 동네(자프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학교도 못 갔고요. 먹을 것도 녹록지 않았고, 동네를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죠. 정부군들이 들어와 괴롭혔어요. 물론 자프나를 가보셔서 알겠지만, 지금은 문제없어요. 학교에서도 싱할라어와 타밀어를 동시에 가르치기도 하고요. 많이 괜찮아졌죠. 얼마 전 총선에서, 자프나 지역 국회의원으로 타밀 정당 사람들이 뽑히기도 했고요.(총 6석 중 Ilankai Tamil Arasu Kadchi당과 All Ceylon Tamil Congress당이 한 자리씩 가져갔다.) 모두가 더 나아질 거라고 얘기해요. (중략) 근데도 여전히 타밀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하층민이거든요. 궂은일을 하고 대물림된 가난으로 더 빈곤하게 사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준비하고 있어요.”
내전 당시 어린 꼬마였던 택시 기사님은 세련된 영국식 영어로 자프나에서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가해자 중심의 해석과 목소리를 잃은 희생자, 문제 제기하지 않는 피해자.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타밀인들을 두고, 혹 내가 듣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지만, 역시나 완전한 화해에 가깝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 피해자 권리 회복,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는 너무 쉽게 힘을 잃지 않나. (본인들이 말하는) 다시금 반복되어선 안 될 역사라면, 그래서 세운 기념관이라면, 그것은 승리를 이끈 군인을 향한 찬미가 아니라 희생자를 향한 애도여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쩐지 몇몇 장면들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미얀마 로힝야족과 티베트, 그러니까 스리랑카 안과 밖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내전 당시 타밀 임시 정부였던 LTTE가 발급한 실제 차량 등록증 (우) ⓒ혜진
2009년 스리랑카 내전은 끝났지만, 역사에 대한 해석과 권리를 향한 투쟁이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역시나 그 중심부엔 20대 초, 중반의 청년들이 있고, 구석구석 애도의 공간들이 있다. 고증이 될 만한 자료가 있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기록이 있다. 오랜 애환 같은 것이 피해자(소수민족) 사이에 퍼져있지만, 아직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가 있다. '다 해결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소수의 목소리는 삶의 형태로, 표정으로, 그러니까 소거된 음의 형태로 발화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어떤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 콜롬보로 향하는 기차에서 외부 전경 ⓒ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