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바를 생각하면 빨간 머리 앤이 떠오른다. 비바는 명랑하고 밝다. 그렇지만 앤이 그러한 것처럼, 비바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지체없이 질문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 질문을 동력 삼아 지체없이 살아내는 활동가이다.
이번 방글라데시 출장이 뜻깊은 순간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었던 건 비바라는 동료 덕분이었다. 그녀가 내게 베푼 호의와 친절 때문도 있겠지만, 현장과 함께하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겐 배움이고 자극이었다.
현장에서의 비바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자신의 포지션과 역할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분쟁지역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 순간 고민한다. 그것은 그녀의 진정성이면서도 동시에 그녀만이 갖춘 힘이다. 그렇기에 비바는 한국의 오피스에서도, 방글라데시의 현지 단체에서도, 난민캠프의 샨티카나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동료이다.
[인터뷰이 소개]
○ 비바(Biva) 아디의 이승지 활동가로, 현재 인도적 지원팀에서 '로힝야 난민 및 수용공동체 여성 심리사회적 회복역량강화 사업' PM으로 함께하고 있다. 2022년 봄에 파견되어 현재까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서 체류하며, 방글라데시 현지 NGO인 RW Welfare Society와 함께 로힝야 난민캠프 '샨티카나'를 꾸리고 있다.
* 인스타그램 (@ken_aso_) 계정을 통해 비바가 올리는 현지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바로가기)

▲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해변에서 자신의 최애 디저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비바 ⓒ사단법인 아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서 로힝야 난민을 대상으로 인도주의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적십자사에서 10년 동안 활동을 했는데요.(웃음) 덕분에 세계의 여러 문제를 일찍 접할 수 있었고 고민할 기회도 많았어요. 그러다 자아를 형성해 가던 중학생 무렵,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부 기관보다는 비정부 기구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에 더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NGO 직원으로 일하는 걸 꿈꿔왔어요.
대학 때는 국제학을 전공으로 공부했어요. 전공 공부를 통해 평화 이슈와 현장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게 됐고, 그렇게 지금까지 연결되어 오고 있습니다.
사실 대학 졸업 후 비바의 첫 시작은 북한 인도적 지원 쪽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아있거든요.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아시아 평화와 관련된 정치경제 수업을 들었어요. 그 수업을 계기로 전 세계를 통틀어 주 분쟁지역 중 하나가 한반도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는데요. 그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왜 바깥으로 눈을 돌렸나! 당장 우리 앞에도 분쟁 상황이 놓여있는데.’라고요. 그렇게 북한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뛰어들게 되었어요.

▲ 숙소 앞에서 새끼 강아지를 구출한 후 숙소 직원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 비바 ⓒ사단법인 아디
현재는 로힝야 난민캠프가 있는 방글라데시에서 인도주의 활동가로 일하고 계시잖아요. 국제 인권 분야로 넘어오게 된 이유가 있으세요?
북한 사업에 대한 애정도 컸고 재미도 있었어요. 그런데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남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현장에 다가가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물론 고위 간부들은 만날 수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어려웠거든요. 그거에 대한 갈증이 무척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장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곳은 정말 현장이죠.(웃음) 일하고 계신 난민캠프를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위치한 로힝야 난민캠프에요. 이곳은 90년대부터 로힝야 난민들이 미얀마로부터 유입된 곳이기도 해요. 국경을 맞닿고 있거든요. 그러다 2017년도 로힝야 대학살 일어나면서, 그 당시 60-70만 명 사람들이 한꺼번에 넘어왔어요. 현재 100만 명, 정확히는 96만 명이 콕스바자르 하단에 있는 캠프에 살고 있어요. 로힝야 난민 캠프는 34개 캠프로 이루어져 있고요, 한 캠프에 대략 2만 명에서 3만 명의 로힝야 난민들이 지내고 계신다고 보면 돼요.
저희가 함께하는 곳은 캠프 14인데요. 2018년 사업을 시작할 당시 캠프 14에 여성힐링센터라든가 심리사회적 지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결과 캠프 14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샨티카나는 다목적 여성 힐링센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잖아요. 실제로 로힝야 난민 여성들의 심리사회적 지원 프로그램과 역량개발 프로그램 등이 이루어지고 있고요. 샨티카나가 젠더 사업을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젠더 사업을 집중하게 된 이유는 여성이 이런 분쟁 상황, 대학살 상황에서 항상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어요. 현장 조사를 위한 인터뷰나 사업에 대한 수요 조사할 때도 남성의 필요나 욕구와 관련된 정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데 반해 여성의 니즈는 확인하기가 어려웠어요. 사실 아디는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인권 기록으로 시작했어요. 인권 기록으로 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에 대한 프로젝트와 지원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획한 게 샨티카나였던 거죠.
로힝야 문화가 특히 여성에게 좀 더 폐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중요 이유 중 하나예요. 사회적인 관계를 쌓는다거나 교육을 받는다거나, 거의 모든 면에서 로힝야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많은 차별을 받거든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젠더적 관점에서의 분석이 필요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던 거예요.

▲ 샨티카나에서 슈퍼비전을 통역 중인 비바 ⓒ사단법인 아디
이 프로젝트는 어느덧 6년 차라고 하더라고요. 비바가 이곳 현장과 함께한 지도 3년 차이고요. 수많은 순간이 있겠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지 여쭤보고 싶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던 여성이 있었어요. 프로그램을 시작만 하면 되는 단계였는데 갑자기 참여를 못 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를 물으니, 남편이 안 된다고 했대요. 그 여성분이 얼마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어 했는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는데 남편이 반대해서 못 오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암담했죠. 사실 이런 상황은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비일비재한 일이에요.
저는 여성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이 일을 하고 있어요. 변화는 그것 자체로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자아효능감을 느끼는 순간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분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뤄내는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회복탄력성도 더해져요. 그리고 회복탄력성은 남편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이끌어내죠. 그것이야말로 현장의 변화인데, 그런 변화가 하나씩 하나씩 보이기 때문에 그게 저의 동기부여가 돼주어요.

▲ 비바는 일주일에 한 번 방글라데시 현지 NGO 여성 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준다. ⓒ사단법인 아디
로힝야 난민 여성들을 향한 비바의 강한 믿음과 애정이 느껴져요.
사실 샨티카나에서 여성(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심리지원단(PSS) 여성들이랑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그냥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볼 때마다 기뻐요. 물론 집안 분위기에 따라 즐거운 가정생활을 하고 계신 여성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위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도 샨티카나에서만큼은 웃고 떠들고 놀 수 있다는 거니까, 그만큼 이곳을 안전하게 느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해요. 그것 자체로 큰 보람이죠.
기쁨과 보람만 있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언어도, 문화도 다르고, 특히 난민캠프라는 특수한 공간에 놓여있는 곳이니만큼 모든 일이 내 맘처럼 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당연히 일을 하며 느꼈던 한계라거나 어려움도 있었겠죠?
애초에 이 프로젝트는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 취약한 여성들을 뽑아서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량이 발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도 사실이에요. 펜을 못 잡던 여성들이 글을 쓰고, 태블릿PC를 무서워하던 여성들(고가의 물건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부담스러움과 같은 감정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이 그걸 활용하여 일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 샨티카나에서 스태프들과 일일업무보고를 진행 중인 비바 ⓒ사단법인 아디
그렇지만 이제는 방글라데시 스태프의 업무 투여율을 줄이고 로힝야 여성들의 업무 투여율 높이는 때이기도 하거든요. 최근에는 그 과정에서 종종 한계를 느껴요. PSS분들은 센터 안에서 프로그램 제공하는 역할 외에도 각자 부여받은 역할이 있어요. 물건을 관리한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재고를 관리기도 하고, 또 등록부 관리도 직접 해요. 그런데 역시나 이 또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에요. 생각해 보면 현지 직원(방글라데시 직원)이 100% 이해하고 실행해도 숙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 건 맞잖아요. 답답할 때가 있지만, 실제로 방글라데시 직원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까지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상태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가보려고 해요.
내년이 아디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마지막 해라고 들었어요. 비바의 파견 근무도 내년이 마지막이 될 텐데, 어떠신가요? ‘마지막’에 대한 의미가 있으실까요?(웃음)
마지막에 대한 의미가 있나!(웃음) 지난 5년 인도적 지원 분야에서 일하며 느낀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현지화(Localization)였어요. 무슨 업무든 그 업무의 최종 목적은 현지화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마지막의 의미는 현지화 그 자체예요. 사실 아디가 지금 당장 떠나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센터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할 자원(매뉴얼)도 만들어놨고, 심리지원단 여성분들도 센터를 운영할 능력을 갖추고 계시죠. 샨티카나를 지원할 방글라데시 풀뿌리단체(RW Welfare Society)도 도너 단체와의 풍부한 협업 경험을 갖추고 있고, 향후 자금 조달도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디가 지금 당장 떠나도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내년에도 소프트 랜딩 할 수 있도록 잘 돕고 싶어요. 아디에게는 마지막이지만 로스와 샨티카나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 되겠죠.
현장에 있다 보면 깨어진 평화와 또 만들어지고 있는 평화를 동시에 목격하실 것 같은데요. 다른 말로 하면 무력감과 가능성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고 계신다고 생각하거든요. 평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평화에 대해서는 대학생 때부터 고민했는데... 한 문장으로 정리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올해 팔레스타인도 가보고(비바는 2023년 10월 아디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에 함께했다.), 현장에서 있으면서 느낀 부분은, ‘평화라는 게 가능한 걸까?’라는 의구심과 동시에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이상을 두고 쫓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설사 평화가 달성할 수 없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인 거죠. 혹은 그 근처에 가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자체가 평화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외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런 태도가 요구되겠죠.

▲ 팔레스타인 평화여행 중 현지 스태프와 기념 촬영 ⓒ사단법인 아디
삶의 궤적에서 이 일을 지속하게 하는 비바만의 믿음이 있을까요?
사실 어떤 믿음이라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 같아요. 우리는 이 광활한 우주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작은 존재인데, 지구 자체도 작고 창백한 푸른 점라고 하잖아요. 이 작은 점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미워하고 그러는 게 얼마나 웃겨요. ‘먼지 같은 곳에서 먼지같이 살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 할까?’ 그런 생각인 거죠. 이왕이면 이걸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이런 아픔에 함께하고자 할 때 이상이라고 여겨졌던 평화와 같은 가치들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향후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젠더쪽을 파고들지, 시스템적인 것을 파고들지, 현장을 파고들지 고민 중이에요. 무슨 일이든 젠더는 무조건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려되어야 하는 크로스 커팅 이슈이기 때문에, 직무가 변경된다고 하더라도 젠더는 꼭 잡고 갈 예정이에요. 더 공부할 수 있는 석, 박사 기회가 있다면 그 주제가 무엇이든 젠더 분석을 같이할 거고요.

▲ 오피스 앞 슈퍼에서 인터뷰를 진행 중인 비바 ⓒ사단법인 아디
인터뷰 내도록 여성에 대한 비바만의 확고한 믿음이 느껴졌거든요. 향후 비바의 여정이 기대되어요.
맞아요. 저는 여성들의 가능성을 믿어요. 이런 믿음을 갖게 한 경험적 기반은, 탈북민도 그렇고, 로힝야도 그렇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위기를 주도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게 여성들이라는 점이었어요.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를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고, 가정을 ‘캐리’하는 건 주로 여성이었거든요. 그런 경험들 덕분에 여성은 강하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연대하며 메시지를 모으면 평화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어요.
마지막으로 나눠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독자들에게 요청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평화와 인도적 지원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항상 얘기하게 되는 것은 ‘일반 시민의 참여’, ‘모두의 참여’였어요. 근본을 따지고 들면 모든 것은 정치에 있다고 봐요. 그런데 정치는 시민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시민이 목소리를 내야 시민을 대표한다는 정치인들도 시민들의 의견에 관심을 가져줄 거거든요. 그러니 관심 있는 뉴스에 댓글도 남겨보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말 한 번 더 얹어보고, 전쟁이나 제노사이드 반대 집회에도 한 번 나가보고, 그런 작은 움직임이 너무 중요할 것 같아요.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시민뿐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로힝야 이슈처럼 난민이나 소수자에 대해 논의할 때, 그들을 혐오하는 시선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참지 말고 한마디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그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기보다 우리랑 똑같은 삶을 사는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그저 불쌍하다.’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상황에서도 저렇게 노력하며 살아가는구나.’하는 게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태도야말로 로힝야 난민 이슈와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연대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 올 여름 아디 전체 활동가와 함께 촬영한 사진 ⓒ사단법인 아디
[인터뷰 시리즈] 샨티카나를 만드는 사람들 전(前)편 다시보기
º 1편 : RW Welfare Society_지니야, 타니야편 바로가기
º 2편 : 사람들에게 평화를_윤영주, 신미화, 장동현편 바로가기
º 3편 : 샨티카나 1대 단장_숌시다편 바로가기
비바를 생각하면 빨간 머리 앤이 떠오른다. 비바는 명랑하고 밝다. 그렇지만 앤이 그러한 것처럼, 비바는 세상의 부조리를 향해 지체없이 질문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 질문을 동력 삼아 지체없이 살아내는 활동가이다.
이번 방글라데시 출장이 뜻깊은 순간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었던 건 비바라는 동료 덕분이었다. 그녀가 내게 베푼 호의와 친절 때문도 있겠지만, 현장과 함께하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겐 배움이고 자극이었다.
현장에서의 비바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자신의 포지션과 역할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분쟁지역 사람들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 순간 고민한다. 그것은 그녀의 진정성이면서도 동시에 그녀만이 갖춘 힘이다. 그렇기에 비바는 한국의 오피스에서도, 방글라데시의 현지 단체에서도, 난민캠프의 샨티카나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동료이다.
[인터뷰이 소개]
○ 비바(Biva) 아디의 이승지 활동가로, 현재 인도적 지원팀에서 '로힝야 난민 및 수용공동체 여성 심리사회적 회복역량강화 사업' PM으로 함께하고 있다. 2022년 봄에 파견되어 현재까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서 체류하며, 방글라데시 현지 NGO인 RW Welfare Society와 함께 로힝야 난민캠프 '샨티카나'를 꾸리고 있다.
* 인스타그램 (@ken_aso_) 계정을 통해 비바가 올리는 현지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바로가기)
▲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해변에서 자신의 최애 디저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비바 ⓒ사단법인 아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서 로힝야 난민을 대상으로 인도주의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적십자사에서 10년 동안 활동을 했는데요.(웃음) 덕분에 세계의 여러 문제를 일찍 접할 수 있었고 고민할 기회도 많았어요. 그러다 자아를 형성해 가던 중학생 무렵,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부 기관보다는 비정부 기구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일하는 것에 더 호감을 느꼈고,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NGO 직원으로 일하는 걸 꿈꿔왔어요.
대학 때는 국제학을 전공으로 공부했어요. 전공 공부를 통해 평화 이슈와 현장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게 됐고, 그렇게 지금까지 연결되어 오고 있습니다.
사실 대학 졸업 후 비바의 첫 시작은 북한 인도적 지원 쪽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아있거든요.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아시아 평화와 관련된 정치경제 수업을 들었어요. 그 수업을 계기로 전 세계를 통틀어 주 분쟁지역 중 하나가 한반도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는데요. 그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왜 바깥으로 눈을 돌렸나! 당장 우리 앞에도 분쟁 상황이 놓여있는데.’라고요. 그렇게 북한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뛰어들게 되었어요.
▲ 숙소 앞에서 새끼 강아지를 구출한 후 숙소 직원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는 비바 ⓒ사단법인 아디
현재는 로힝야 난민캠프가 있는 방글라데시에서 인도주의 활동가로 일하고 계시잖아요. 국제 인권 분야로 넘어오게 된 이유가 있으세요?
북한 사업에 대한 애정도 컸고 재미도 있었어요. 그런데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남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현장에 다가가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물론 고위 간부들은 만날 수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어려웠거든요. 그거에 대한 갈증이 무척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현장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곳은 정말 현장이죠.(웃음) 일하고 계신 난민캠프를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위치한 로힝야 난민캠프에요. 이곳은 90년대부터 로힝야 난민들이 미얀마로부터 유입된 곳이기도 해요. 국경을 맞닿고 있거든요. 그러다 2017년도 로힝야 대학살 일어나면서, 그 당시 60-70만 명 사람들이 한꺼번에 넘어왔어요. 현재 100만 명, 정확히는 96만 명이 콕스바자르 하단에 있는 캠프에 살고 있어요. 로힝야 난민 캠프는 34개 캠프로 이루어져 있고요, 한 캠프에 대략 2만 명에서 3만 명의 로힝야 난민들이 지내고 계신다고 보면 돼요.
저희가 함께하는 곳은 캠프 14인데요. 2018년 사업을 시작할 당시 캠프 14에 여성힐링센터라든가 심리사회적 지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 결과 캠프 14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샨티카나는 다목적 여성 힐링센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잖아요. 실제로 로힝야 난민 여성들의 심리사회적 지원 프로그램과 역량개발 프로그램 등이 이루어지고 있고요. 샨티카나가 젠더 사업을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젠더 사업을 집중하게 된 이유는 여성이 이런 분쟁 상황, 대학살 상황에서 항상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어요. 현장 조사를 위한 인터뷰나 사업에 대한 수요 조사할 때도 남성의 필요나 욕구와 관련된 정보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데 반해 여성의 니즈는 확인하기가 어려웠어요. 사실 아디는 이 사업을 시작할 때, 인권 기록으로 시작했어요. 인권 기록으로 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에 대한 프로젝트와 지원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획한 게 샨티카나였던 거죠.
로힝야 문화가 특히 여성에게 좀 더 폐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중요 이유 중 하나예요. 사회적인 관계를 쌓는다거나 교육을 받는다거나, 거의 모든 면에서 로힝야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많은 차별을 받거든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젠더적 관점에서의 분석이 필요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던 거예요.
▲ 샨티카나에서 슈퍼비전을 통역 중인 비바 ⓒ사단법인 아디
이 프로젝트는 어느덧 6년 차라고 하더라고요. 비바가 이곳 현장과 함께한 지도 3년 차이고요. 수많은 순간이 있겠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지 여쭤보고 싶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자 하던 여성이 있었어요. 프로그램을 시작만 하면 되는 단계였는데 갑자기 참여를 못 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를 물으니, 남편이 안 된다고 했대요. 그 여성분이 얼마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어 했는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는데 남편이 반대해서 못 오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참 암담했죠. 사실 이런 상황은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비일비재한 일이에요.
저는 여성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대하며 이 일을 하고 있어요. 변화는 그것 자체로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자아효능감을 느끼는 순간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여성분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뤄내는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회복탄력성도 더해져요. 그리고 회복탄력성은 남편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이끌어내죠. 그것이야말로 현장의 변화인데, 그런 변화가 하나씩 하나씩 보이기 때문에 그게 저의 동기부여가 돼주어요.
▲ 비바는 일주일에 한 번 방글라데시 현지 NGO 여성 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준다. ⓒ사단법인 아디
로힝야 난민 여성들을 향한 비바의 강한 믿음과 애정이 느껴져요.
사실 샨티카나에서 여성(프로그램 참여자)들이 심리지원단(PSS) 여성들이랑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그냥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볼 때마다 기뻐요. 물론 집안 분위기에 따라 즐거운 가정생활을 하고 계신 여성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 위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도 샨티카나에서만큼은 웃고 떠들고 놀 수 있다는 거니까, 그만큼 이곳을 안전하게 느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해요. 그것 자체로 큰 보람이죠.
기쁨과 보람만 있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언어도, 문화도 다르고, 특히 난민캠프라는 특수한 공간에 놓여있는 곳이니만큼 모든 일이 내 맘처럼 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당연히 일을 하며 느꼈던 한계라거나 어려움도 있었겠죠?
애초에 이 프로젝트는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 취약한 여성들을 뽑아서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량이 발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도 사실이에요. 펜을 못 잡던 여성들이 글을 쓰고, 태블릿PC를 무서워하던 여성들(고가의 물건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부담스러움과 같은 감정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이 그걸 활용하여 일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 샨티카나에서 스태프들과 일일업무보고를 진행 중인 비바 ⓒ사단법인 아디
그렇지만 이제는 방글라데시 스태프의 업무 투여율을 줄이고 로힝야 여성들의 업무 투여율 높이는 때이기도 하거든요. 최근에는 그 과정에서 종종 한계를 느껴요. PSS분들은 센터 안에서 프로그램 제공하는 역할 외에도 각자 부여받은 역할이 있어요. 물건을 관리한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재고를 관리기도 하고, 또 등록부 관리도 직접 해요. 그런데 역시나 이 또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에요. 생각해 보면 현지 직원(방글라데시 직원)이 100% 이해하고 실행해도 숙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 건 맞잖아요. 답답할 때가 있지만, 실제로 방글라데시 직원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까지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상태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가보려고 해요.
내년이 아디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마지막 해라고 들었어요. 비바의 파견 근무도 내년이 마지막이 될 텐데, 어떠신가요? ‘마지막’에 대한 의미가 있으실까요?(웃음)
마지막에 대한 의미가 있나!(웃음) 지난 5년 인도적 지원 분야에서 일하며 느낀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현지화(Localization)였어요. 무슨 업무든 그 업무의 최종 목적은 현지화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마지막의 의미는 현지화 그 자체예요. 사실 아디가 지금 당장 떠나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센터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할 자원(매뉴얼)도 만들어놨고, 심리지원단 여성분들도 센터를 운영할 능력을 갖추고 계시죠. 샨티카나를 지원할 방글라데시 풀뿌리단체(RW Welfare Society)도 도너 단체와의 풍부한 협업 경험을 갖추고 있고, 향후 자금 조달도 완료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디가 지금 당장 떠나도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내년에도 소프트 랜딩 할 수 있도록 잘 돕고 싶어요. 아디에게는 마지막이지만 로스와 샨티카나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 되겠죠.
현장에 있다 보면 깨어진 평화와 또 만들어지고 있는 평화를 동시에 목격하실 것 같은데요. 다른 말로 하면 무력감과 가능성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고 계신다고 생각하거든요. 평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평화에 대해서는 대학생 때부터 고민했는데... 한 문장으로 정리가 잘 안되는 것 같아요.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올해 팔레스타인도 가보고(비바는 2023년 10월 아디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에 함께했다.), 현장에서 있으면서 느낀 부분은, ‘평화라는 게 가능한 걸까?’라는 의구심과 동시에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이상을 두고 쫓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설사 평화가 달성할 수 없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인 거죠. 혹은 그 근처에 가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자체가 평화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외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런 태도가 요구되겠죠.
▲ 팔레스타인 평화여행 중 현지 스태프와 기념 촬영 ⓒ사단법인 아디
삶의 궤적에서 이 일을 지속하게 하는 비바만의 믿음이 있을까요?
사실 어떤 믿음이라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 같아요. 우리는 이 광활한 우주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작은 존재인데, 지구 자체도 작고 창백한 푸른 점라고 하잖아요. 이 작은 점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미워하고 그러는 게 얼마나 웃겨요. ‘먼지 같은 곳에서 먼지같이 살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 할까?’ 그런 생각인 거죠. 이왕이면 이걸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이런 아픔에 함께하고자 할 때 이상이라고 여겨졌던 평화와 같은 가치들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향후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젠더쪽을 파고들지, 시스템적인 것을 파고들지, 현장을 파고들지 고민 중이에요. 무슨 일이든 젠더는 무조건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려되어야 하는 크로스 커팅 이슈이기 때문에, 직무가 변경된다고 하더라도 젠더는 꼭 잡고 갈 예정이에요. 더 공부할 수 있는 석, 박사 기회가 있다면 그 주제가 무엇이든 젠더 분석을 같이할 거고요.
▲ 오피스 앞 슈퍼에서 인터뷰를 진행 중인 비바 ⓒ사단법인 아디
인터뷰 내도록 여성에 대한 비바만의 확고한 믿음이 느껴졌거든요. 향후 비바의 여정이 기대되어요.
맞아요. 저는 여성들의 가능성을 믿어요. 이런 믿음을 갖게 한 경험적 기반은, 탈북민도 그렇고, 로힝야도 그렇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위기를 주도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게 여성들이라는 점이었어요.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녀를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고, 가정을 ‘캐리’하는 건 주로 여성이었거든요. 그런 경험들 덕분에 여성은 강하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연대하며 메시지를 모으면 평화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어요.
마지막으로 나눠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독자들에게 요청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평화와 인도적 지원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항상 얘기하게 되는 것은 ‘일반 시민의 참여’, ‘모두의 참여’였어요. 근본을 따지고 들면 모든 것은 정치에 있다고 봐요. 그런데 정치는 시민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시민이 목소리를 내야 시민을 대표한다는 정치인들도 시민들의 의견에 관심을 가져줄 거거든요. 그러니 관심 있는 뉴스에 댓글도 남겨보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말 한 번 더 얹어보고, 전쟁이나 제노사이드 반대 집회에도 한 번 나가보고, 그런 작은 움직임이 너무 중요할 것 같아요. 정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시민뿐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로힝야 이슈처럼 난민이나 소수자에 대해 논의할 때, 그들을 혐오하는 시선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참지 말고 한마디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그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기보다 우리랑 똑같은 삶을 사는 하나의 개인으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그저 불쌍하다.’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상황에서도 저렇게 노력하며 살아가는구나.’하는 게 더 잘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태도야말로 로힝야 난민 이슈와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연대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 올 여름 아디 전체 활동가와 함께 촬영한 사진 ⓒ사단법인 아디
[인터뷰 시리즈] 샨티카나를 만드는 사람들 전(前)편 다시보기
º 1편 : RW Welfare Society_지니야, 타니야편 바로가기
º 2편 : 사람들에게 평화를_윤영주, 신미화, 장동현편 바로가기
º 3편 : 샨티카나 1대 단장_숌시다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