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조해민 YP)의 로힝야 난민캠프 출장기는 상편과 하편으로 나뉩니다. 상편에서는 방글라데시에 도착했던 1일차부터 샨티카나에 방문했던 3일차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Ken aso? = 어떻게 지내?(How are you?와 같은 의미)
떨리는 마음으로 첫 출장을 떠나다
어느새 출국 날이 다가왔다. 인천을 떠나 방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카에서 콕스바자르까지 꽤 긴 여정을 보냈다. 해가 지고 깜깜해진 늦은 저녁, 드디어 콕스바자르에 도착했다. 콕스바자르 공항까지 아디 출장팀을 위해 마중 나와준 자말(RWWS의 M&E manager)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그다음 날, 우리는 난민캠프의 출입 허가를 받기 위해 RRRC(Refugee Relief and Repatriation Commissioner) 사무실로 향했다. “허가”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 때문인지, 혹시나 캠프에 출입할 수 없게 될까 긴장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진행해 온 우리의 프로젝트와 이를 함께한 현지단체 RWWS(RW Welfare Society)의 높은 신뢰도 덕분에 별문제 없이 캠프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RRRC 사무실 입구 ⓒ사단법인 아디
처음으로 난민캠프를 마주하다
4월 9일, 1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 끝에 드디어 난민캠프에 도착했다. 각 캠프를 관리하는 CiC(Camp in Charge)에 다시 한번 출입 허가를 받았다.


▲ 흙먼지로 뿌옇게 찍힌 캠프의 모습(좌) / 쓰레기로 오염된 캠프 내 하천(우) ⓒ사단법인 아디
샨티카나로 가는 길에는 캠프 주변 상황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가와 하천에 버려진 쓰레기들, 사생활이 지켜질 수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쉘터들, 드물게 보이는 열악한 공중화장실 등이 난민 캠프의 어려운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일상적인 발걸음에도 흙먼지가 일어나며 쉽게 미끄러져 버리는 약한 토양과 가파른 경사, 오염된 하천들을 보면서 몬순 시기에 로힝야 난민들이 겪는 홍수 피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올해 몬순에는 부디 모든 사람이 무사하길 바라며 발길을 옮겼다.
평화의 집, 샨티카나에 들어서다
▲ 샨티카나 외부 ⓒ사단법인 아디
캠프 주변을 살피며 바삐 걷다보니 어느새 샨티카나에 도착했다. ‘평화의 집’이라는 뜻과 걸맞게 열악한 캠프 상황 속에서도 샨티카나만큼은 어딘가 모를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흐린 날씨에도 샨티카나에는 기분 좋은 햇살이 드리운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 한톨이 제작하여 샨티카나에 선물한 작품 ⓒ사단법인 아디

▲ 샨티카나 내부 복도 ⓒ사단법인 아디

▲ 샨티카나 여성들이 관리하는 채소 정원 ⓒ사단법인 아디
샨티카나 곳곳에는 7년 동안 이끌어온 이야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한톨(아디와 함께한 협업 예술인)이 샨티카나에 선물했던 작품 역시 샨티카나 벽 한쪽에 예쁘게 걸려있었다. 샨티카나의 여성들이 직접 관리하는 채소 정원과 CBP(Community Business Program) 및 여러 교육을 진행하는 교실 등 많은 곳이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샨티카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안에 들어서니 샨티카나의 PSS 여성들이 모여 아디 출장팀을 반갑게 환대해 주었다. 샨티카나의 프로그램은 현재 UN Women에 이양되었다. 아디는 사업을 새로운 파트너와 시작하는 과정에서 PSS 여성들에게 어려운 점이나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 물었고, UN Women을 통해 국제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경청했다. 샨티카나 여성들은 KOICA, 아디 등 한국의 단체와 같이 일한 7년을 즐겁고 소중했던 시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디 출장팀은 PSS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구호란 어떤 것인지, 앞으로 아디 또는 대한민국 사회가 로힝야 난민 이슈에 대해 취해야 하는 태도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았다.
CBP 생계 교육의 일환인 Block Session을 참관하게 되었다. Block Session은 문양이 조각된 커다란 판을 천에 도장처럼 찍어내어 예쁜 문양을 새기고 이를 이용해 옷이나 숄 등을 만드는 것을 교육하는 수업이다. 참가 여성들은 강사가 만들어내는 작품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여성들의 아이들이 찾아와서 가끔 수업 분위기를 방해하기도 했지만, 이는 샨티카나가 로힝야 난민 여성들에게 양육과 학습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Block Session ⓒ사단법인 아디
샨티카나의 여성들, 자신의 힘을 깨닫다


▲ 현 CBP 참가 로힝야/호스트 커뮤니티 여성 인터뷰(좌) / 전년도 CBP 참가 여성 인터뷰(우) ⓒ사단법인 아디
그 이후, 아디 출장팀은 전년도와 올해 CBP 참여자들을 인터뷰했다. 전공 특성 때문에 여러 인터뷰를 진행해 봤었지만, 첫 출장에서 사업에 대한, 그것도 한국어도 영어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통역을 끼고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긴장했었다. 그러나, 옆에서 통역과 진행을 도와준 RWWS의 루미와 지니아, 인터뷰를 같이 진행한 사나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현재 CBP에 참가하고 있는 여성들과 전년도 참가 여성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을 했었다. 전에는 글자도 읽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숫자도 셀 수 없던 여성들이 CBP를 통해 글자를 배우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쓸 줄 알게 되고, 숫자를 쓰고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전년도 CBP 참가 여성은 문해 수리 교육 덕분에 가게를 운영하여 가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로힝야의 보수적인 성 규범으로 인해 남성 보호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없다고 믿었던 로힝야 여성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라는 감각을 익히게 되었다. 샨티카나 여성들은 그렇게 자신의 힘을 깨닫고 자신 있게 삶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변화가 큰 기적을 이뤄내길 바라며
아직도 로힝야 난민 캠프 내외의 상황은 아주 열악하다. 그중에서도 로힝야 난민 여성의 삶은 수많은 차별, 고립, 폭력에 직면해 있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로힝야 난민들의 현 상황을 보면 희망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낼 수 없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한 변화를 보았다. 한 명의 여성이 이름을 쓸 수 있게 되고, 또 다른 한 명의 여성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 명의 변화가 수십 명, 수백 명의 변화를 일으킨다. 샨티카나에서 성장한 수많은 PSS가 7년동안 950개의 자조 모임을 이루고 이를 통해 4,262명의 여성들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변화들이 모여 언젠간 큰 물결을 이루길, 그 물결을 타고 기적이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 구름(조해민 YP)의 로힝야 난민캠프 출장기는 상편과 하편으로 나뉩니다. 상편에서는 방글라데시에 도착했던 1일차부터 샨티카나에 방문했던 3일차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Ken aso? = 어떻게 지내?(How are you?와 같은 의미)
떨리는 마음으로 첫 출장을 떠나다
어느새 출국 날이 다가왔다. 인천을 떠나 방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카에서 콕스바자르까지 꽤 긴 여정을 보냈다. 해가 지고 깜깜해진 늦은 저녁, 드디어 콕스바자르에 도착했다. 콕스바자르 공항까지 아디 출장팀을 위해 마중 나와준 자말(RWWS의 M&E manager)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그다음 날, 우리는 난민캠프의 출입 허가를 받기 위해 RRRC(Refugee Relief and Repatriation Commissioner) 사무실로 향했다. “허가”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 때문인지, 혹시나 캠프에 출입할 수 없게 될까 긴장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진행해 온 우리의 프로젝트와 이를 함께한 현지단체 RWWS(RW Welfare Society)의 높은 신뢰도 덕분에 별문제 없이 캠프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RRRC 사무실 입구 ⓒ사단법인 아디
처음으로 난민캠프를 마주하다
4월 9일, 1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 끝에 드디어 난민캠프에 도착했다. 각 캠프를 관리하는 CiC(Camp in Charge)에 다시 한번 출입 허가를 받았다.
▲ 흙먼지로 뿌옇게 찍힌 캠프의 모습(좌) / 쓰레기로 오염된 캠프 내 하천(우) ⓒ사단법인 아디
샨티카나로 가는 길에는 캠프 주변 상황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가와 하천에 버려진 쓰레기들, 사생활이 지켜질 수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쉘터들, 드물게 보이는 열악한 공중화장실 등이 난민 캠프의 어려운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일상적인 발걸음에도 흙먼지가 일어나며 쉽게 미끄러져 버리는 약한 토양과 가파른 경사, 오염된 하천들을 보면서 몬순 시기에 로힝야 난민들이 겪는 홍수 피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올해 몬순에는 부디 모든 사람이 무사하길 바라며 발길을 옮겼다.
평화의 집, 샨티카나에 들어서다
캠프 주변을 살피며 바삐 걷다보니 어느새 샨티카나에 도착했다. ‘평화의 집’이라는 뜻과 걸맞게 열악한 캠프 상황 속에서도 샨티카나만큼은 어딘가 모를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흐린 날씨에도 샨티카나에는 기분 좋은 햇살이 드리운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 한톨이 제작하여 샨티카나에 선물한 작품 ⓒ사단법인 아디
▲ 샨티카나 내부 복도 ⓒ사단법인 아디
▲ 샨티카나 여성들이 관리하는 채소 정원 ⓒ사단법인 아디
샨티카나 곳곳에는 7년 동안 이끌어온 이야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한톨(아디와 함께한 협업 예술인)이 샨티카나에 선물했던 작품 역시 샨티카나 벽 한쪽에 예쁘게 걸려있었다. 샨티카나의 여성들이 직접 관리하는 채소 정원과 CBP(Community Business Program) 및 여러 교육을 진행하는 교실 등 많은 곳이 정성껏 가꾸어져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샨티카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안에 들어서니 샨티카나의 PSS 여성들이 모여 아디 출장팀을 반갑게 환대해 주었다. 샨티카나의 프로그램은 현재 UN Women에 이양되었다. 아디는 사업을 새로운 파트너와 시작하는 과정에서 PSS 여성들에게 어려운 점이나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 물었고, UN Women을 통해 국제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도 경청했다. 샨티카나 여성들은 KOICA, 아디 등 한국의 단체와 같이 일한 7년을 즐겁고 소중했던 시간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디 출장팀은 PSS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구호란 어떤 것인지, 앞으로 아디 또는 대한민국 사회가 로힝야 난민 이슈에 대해 취해야 하는 태도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았다.
◀ Block Session ⓒ사단법인 아디
샨티카나의 여성들, 자신의 힘을 깨닫다
▲ 현 CBP 참가 로힝야/호스트 커뮤니티 여성 인터뷰(좌) / 전년도 CBP 참가 여성 인터뷰(우) ⓒ사단법인 아디
그 이후, 아디 출장팀은 전년도와 올해 CBP 참여자들을 인터뷰했다. 전공 특성 때문에 여러 인터뷰를 진행해 봤었지만, 첫 출장에서 사업에 대한, 그것도 한국어도 영어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통역을 끼고 하는 인터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긴장했었다. 그러나, 옆에서 통역과 진행을 도와준 RWWS의 루미와 지니아, 인터뷰를 같이 진행한 사나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현재 CBP에 참가하고 있는 여성들과 전년도 참가 여성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을 했었다. 전에는 글자도 읽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숫자도 셀 수 없던 여성들이 CBP를 통해 글자를 배우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쓸 줄 알게 되고, 숫자를 쓰고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전년도 CBP 참가 여성은 문해 수리 교육 덕분에 가게를 운영하여 가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로힝야의 보수적인 성 규범으로 인해 남성 보호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없다고 믿었던 로힝야 여성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라는 감각을 익히게 되었다. 샨티카나 여성들은 그렇게 자신의 힘을 깨닫고 자신 있게 삶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변화가 큰 기적을 이뤄내길 바라며
아직도 로힝야 난민 캠프 내외의 상황은 아주 열악하다. 그중에서도 로힝야 난민 여성의 삶은 수많은 차별, 고립, 폭력에 직면해 있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로힝야 난민들의 현 상황을 보면 희망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낼 수 없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한 변화를 보았다. 한 명의 여성이 이름을 쓸 수 있게 되고, 또 다른 한 명의 여성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 명의 변화가 수십 명, 수백 명의 변화를 일으킨다. 샨티카나에서 성장한 수많은 PSS가 7년동안 950개의 자조 모임을 이루고 이를 통해 4,262명의 여성들을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변화들이 모여 언젠간 큰 물결을 이루길, 그 물결을 타고 기적이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