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록사나(박다은 활동가)의 로힝야 난민캠프 출장기는 총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편은 하(下)편입니다.
○ 본편에서는 방글라데시 현지 출장 8일차부터 16일차까지의 내용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정신없이 지나간 난민캠프에서의 일정을 뒤로하고, 나는 콕스바자르 마린 드라이브의 마우이 리조트(Maui Resort)에서 현지 단체 직원들과 함께 워크숍에 참석했다. 사실 워크숍 기간에도, 그리고 워크숍을 끝으로 콕스바자르를 떠나 치타공으로 이동하면서도,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카의 국제 공항에서 인천으로 출국하면서도, 그리고 서울의 집에 도착해서도 샨티카나와 난민캠프 곳곳에서 만났던 로힝야 아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샨티카나에서 만난 아이는 PSS 여성의 자녀였는데, 그 아이를 품에 안던 순간 느껴지던 체온. 오직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그 따스한 온기를 잊지 못한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나를 마주 안고, 나의 코와 뺨을 더듬어 보고, 나의 눈을 바라보고 웃으며 자신을 안은 내 오른팔을 힘주어 붙잡던 그 손길을 잊지 못한다.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교감하고, 또 아이에게 정성을 쏟은 그 시간은 내게 너무 특별했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마주하는 건 하나의 작은 우주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대한민국과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그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함께하게 된 나의 새로운 우주가 어찌 경이롭지 않을까?
이 이이를 안고 동시에 나는 샨티카나 밖, 그동안 방문했던 난민캠프 곳곳에서 짧은 영어로 인사를 건네오던 로힝야 아이들을 떠올렸다. “Hi.”, “Bye.”와 같은 말은 물론이요, 조금 더 나아가서 “How are you?”, “Where are you from?”, “How many brothers and sisters do you have?”를 외치던 그 맑은 눈동자와 명랑한 목소리들이 내 안에서 공명했다. 거대한 해일처럼 내게로 밀려오는 이 다채로운 우주들에게, 아쉽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아이들의 하루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똑같이 인사를 건네주고, 질문에 성의껏 답하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 캠프14 샨티카나로 가는 길에서 로힝야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비바, 푸딩, 록사나 (사진=사단법인 아디)
그 때문에 나는 난민캠프에 출입한 이후 처음으로 무력감과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아디가 방글라데시 현지 단체인 MAISHA, RWWS와 컨소시엄으로 운영 중인 샨티카나는 로힝야 여성들을 위한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를 제공하고 있고, 프로그램이나 각종 커리큘럼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 울타리 너머의 세상인 난민캠프 곳곳에는 아직도 짙은 그림자가 더 많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디와 한국 사회는 로힝야 난민 이슈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 갈 것인가, 국제사회는 이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는가 등 답하기 어려운 수많은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 질문들과 더불어 나는 태어나서 보고 자란 세계가 오직 난민캠프의 철조망 내부로 국한되는 로힝야 아이들의 오늘과 내일을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이는 내가 공감 능력을 지닌 한 개인이자, 한국에서 아동·청소년복지를 공부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한 명 한 명이 모두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을 그 아이들이 철조망 속 세상에서 써 내려갈 이야기가 모두 장밋빛을 품은 해피 엔딩은 아닐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감각은 한국에서 사무실 업무만 수행하던 때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일전에 캠프4에 위치한 아디의 협력 기관인 JRS가 운영하는 아동청소년 사업장(Joy)에서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다수의 로힝야 아동·청소년들은 미래에 교사, 의사, 사업가 등이 되기를 꿈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난민캠프 내에서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기초적인 교육, 그리고 난민들을 자신의 땅에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없게 만드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기조 등은 결코 이들에게 친절하지도 또 충분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매일 심어가는 역할이 만성적인 재난 상황에서 인도적 지원을 수행하고 있는 아디와 같은 NGO 단체들의 사명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겠지만, 누구라도 해야 할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우리의 난민캠프 출입이 허락된 제한된 시간만이라도 위로와 공감과 연대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로힝야 아이들의 삶 속에 일상의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지 직원들과의 워크숍을 되돌아보면, 현지 단체를 이끄는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 라지아 술타나가 어떻게 단체를 설립하고 인도적 지원을 비롯한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서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아디에서는 별빛(공선주 활동가)이 MAISHA, RWWS와 아디의 관계, 아디의 지향점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 그룹 간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으나, 사실 내게 이번 워크숍이 특별했던 이유는 아디와 협업을 통해 성장해 나간 세 명의 방글라데시 여성 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서울과 방글라데시의 콕스바자르. 이렇게 물리적 거리가 동반되는 업무환경의 특성상 주로 보고서, 이메일, 왓츠앱, 노션 등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던 나와 세 명의 여성 활동가들이 직접 눈을 마주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1:1 인터뷰를 통해 서로의 내밀하고 진실한 이야기까지도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비록 오늘도 인터뷰 녹음 파일을 들으며 한 자, 한 자 전사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그 시간 자체는 충분히 값지고 의미 있었다. 나중에 이 인터뷰의 기록을 어떻게 활용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는 귀중한 토대가 될 것이다.
워크숍과 환송회까지 마무리한 후, 치타공으로 이동했다. RWWS의 본부가 콕스바자르가 아닌 치타공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해당 본부를 방문하여 미팅을 하고 3차년도 사업의 종료와 리더십 이양에 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모든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적 지원 사업이 그러하듯, 현지에 주도성을 넘겨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은 아디의 로힝야 여성 사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방글라데시 호스트 커뮤니티와 로힝야 난민들, 그리고 아디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치타공 시내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당일 밤에 바로 침대칸 열차를 타고 다카로 향했다. 다카에 도착해서 코이카 사무소를 방문하고(별빛과 비바의 몫이었다), 주방글라데시 대한민국 대사관을 단체로 방문하여 6월 말 ~ 7월 초에 있을 현지 직원들의 한국 초청을 위한 비자 신청을 지원하는 업무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생애 최초로 방글라데시의 기차, 그것도 침대칸을 경험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침대 좌석마다 이불, 깔개, 베개가 준비되어 있고 에어컨도 잘 작동해서 생각보다 더 편안한 이동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주요했다. 아디와 함께하는 출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었으리라.
다카에 도착해서도 근무 시간 중에는 여러 업무를 수행하고, 저녁에는 네트워킹을 위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방글라데시에서 나를 맞아준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낯선 이방인인 나에 대한 배려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봐 주었기에 끝까지 출장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콕스바자르에서부터 함께한 우리의 현지 직원들 자말, 루미, 지니아, 꼬히누르, 알람기르, 조이르, 파하드. 그리고 RWWS와 MAISHA를 이끄는 라지아와 나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들을 지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록사나와 듀크. 또한, 아디와 직접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는 않지만, RWWS의 인연으로 이번 출장을 도와준 할리마와 우리의 일원인 듯 일원 아닌 하빕,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부터 이어진 아디와의 인연으로 짧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 B.M.과 그의 가족들까지. 조금은 느리고 서투르지만 정이 넘치는 나라 방글라데시와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만난 모든 로힝야 난민들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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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사나(박다은 활동가)의 로힝야 난민캠프 출장기는 총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편은 하(下)편입니다.
○ 본편에서는 방글라데시 현지 출장 8일차부터 16일차까지의 내용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정신없이 지나간 난민캠프에서의 일정을 뒤로하고, 나는 콕스바자르 마린 드라이브의 마우이 리조트(Maui Resort)에서 현지 단체 직원들과 함께 워크숍에 참석했다. 사실 워크숍 기간에도, 그리고 워크숍을 끝으로 콕스바자르를 떠나 치타공으로 이동하면서도,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카의 국제 공항에서 인천으로 출국하면서도, 그리고 서울의 집에 도착해서도 샨티카나와 난민캠프 곳곳에서 만났던 로힝야 아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샨티카나에서 만난 아이는 PSS 여성의 자녀였는데, 그 아이를 품에 안던 순간 느껴지던 체온. 오직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그 따스한 온기를 잊지 못한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은 나를 마주 안고, 나의 코와 뺨을 더듬어 보고, 나의 눈을 바라보고 웃으며 자신을 안은 내 오른팔을 힘주어 붙잡던 그 손길을 잊지 못한다.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교감하고, 또 아이에게 정성을 쏟은 그 시간은 내게 너무 특별했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마주하는 건 하나의 작은 우주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들 한다. 대한민국과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그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함께하게 된 나의 새로운 우주가 어찌 경이롭지 않을까?
이 이이를 안고 동시에 나는 샨티카나 밖, 그동안 방문했던 난민캠프 곳곳에서 짧은 영어로 인사를 건네오던 로힝야 아이들을 떠올렸다. “Hi.”, “Bye.”와 같은 말은 물론이요, 조금 더 나아가서 “How are you?”, “Where are you from?”, “How many brothers and sisters do you have?”를 외치던 그 맑은 눈동자와 명랑한 목소리들이 내 안에서 공명했다. 거대한 해일처럼 내게로 밀려오는 이 다채로운 우주들에게, 아쉽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아이들의 하루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똑같이 인사를 건네주고, 질문에 성의껏 답하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는 말이다.
▲ 캠프14 샨티카나로 가는 길에서 로힝야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비바, 푸딩, 록사나 (사진=사단법인 아디)
그 때문에 나는 난민캠프에 출입한 이후 처음으로 무력감과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아디가 방글라데시 현지 단체인 MAISHA, RWWS와 컨소시엄으로 운영 중인 샨티카나는 로힝야 여성들을 위한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를 제공하고 있고, 프로그램이나 각종 커리큘럼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 울타리 너머의 세상인 난민캠프 곳곳에는 아직도 짙은 그림자가 더 많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디와 한국 사회는 로힝야 난민 이슈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 갈 것인가, 국제사회는 이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하는가 등 답하기 어려운 수많은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 질문들과 더불어 나는 태어나서 보고 자란 세계가 오직 난민캠프의 철조망 내부로 국한되는 로힝야 아이들의 오늘과 내일을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이는 내가 공감 능력을 지닌 한 개인이자, 한국에서 아동·청소년복지를 공부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한 명 한 명이 모두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을 그 아이들이 철조망 속 세상에서 써 내려갈 이야기가 모두 장밋빛을 품은 해피 엔딩은 아닐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감각은 한국에서 사무실 업무만 수행하던 때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일전에 캠프4에 위치한 아디의 협력 기관인 JRS가 운영하는 아동청소년 사업장(Joy)에서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다수의 로힝야 아동·청소년들은 미래에 교사, 의사, 사업가 등이 되기를 꿈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난민캠프 내에서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기초적인 교육, 그리고 난민들을 자신의 땅에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없게 만드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기조 등은 결코 이들에게 친절하지도 또 충분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매일 심어가는 역할이 만성적인 재난 상황에서 인도적 지원을 수행하고 있는 아디와 같은 NGO 단체들의 사명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겠지만, 누구라도 해야 할 그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우리의 난민캠프 출입이 허락된 제한된 시간만이라도 위로와 공감과 연대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로힝야 아이들의 삶 속에 일상의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현지 직원들과의 워크숍을 되돌아보면, 현지 단체를 이끄는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 라지아 술타나가 어떻게 단체를 설립하고 인도적 지원을 비롯한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와 서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아디에서는 별빛(공선주 활동가)이 MAISHA, RWWS와 아디의 관계, 아디의 지향점 등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 그룹 간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으나, 사실 내게 이번 워크숍이 특별했던 이유는 아디와 협업을 통해 성장해 나간 세 명의 방글라데시 여성 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서울과 방글라데시의 콕스바자르. 이렇게 물리적 거리가 동반되는 업무환경의 특성상 주로 보고서, 이메일, 왓츠앱, 노션 등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들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던 나와 세 명의 여성 활동가들이 직접 눈을 마주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1:1 인터뷰를 통해 서로의 내밀하고 진실한 이야기까지도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비록 오늘도 인터뷰 녹음 파일을 들으며 한 자, 한 자 전사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그 시간 자체는 충분히 값지고 의미 있었다. 나중에 이 인터뷰의 기록을 어떻게 활용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목소리가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는 귀중한 토대가 될 것이다.
워크숍과 환송회까지 마무리한 후, 치타공으로 이동했다. RWWS의 본부가 콕스바자르가 아닌 치타공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해당 본부를 방문하여 미팅을 하고 3차년도 사업의 종료와 리더십 이양에 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모든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적 지원 사업이 그러하듯, 현지에 주도성을 넘겨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은 아디의 로힝야 여성 사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것이 방글라데시 호스트 커뮤니티와 로힝야 난민들, 그리고 아디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치타공 시내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당일 밤에 바로 침대칸 열차를 타고 다카로 향했다. 다카에 도착해서 코이카 사무소를 방문하고(별빛과 비바의 몫이었다), 주방글라데시 대한민국 대사관을 단체로 방문하여 6월 말 ~ 7월 초에 있을 현지 직원들의 한국 초청을 위한 비자 신청을 지원하는 업무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생애 최초로 방글라데시의 기차, 그것도 침대칸을 경험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침대 좌석마다 이불, 깔개, 베개가 준비되어 있고 에어컨도 잘 작동해서 생각보다 더 편안한 이동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주요했다. 아디와 함께하는 출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었으리라.
다카에 도착해서도 근무 시간 중에는 여러 업무를 수행하고, 저녁에는 네트워킹을 위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방글라데시에서 나를 맞아준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낯선 이방인인 나에 대한 배려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봐 주었기에 끝까지 출장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콕스바자르에서부터 함께한 우리의 현지 직원들 자말, 루미, 지니아, 꼬히누르, 알람기르, 조이르, 파하드. 그리고 RWWS와 MAISHA를 이끄는 라지아와 나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들을 지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록사나와 듀크. 또한, 아디와 직접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는 않지만, RWWS의 인연으로 이번 출장을 도와준 할리마와 우리의 일원인 듯 일원 아닌 하빕,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부터 이어진 아디와의 인연으로 짧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 B.M.과 그의 가족들까지. 조금은 느리고 서투르지만 정이 넘치는 나라 방글라데시와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만난 모든 로힝야 난민들을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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