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이어진 10년>은 사단법인 아디의 10주년을 맞아 여정을 돌아보기 위한 인터뷰 기록입니다.
아디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 아디의 곁을 지켜온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아디와 연결된 사람까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이야기를 모아 아디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그려가고자 합니다.
인터뷰는 아디의 10주년 행사 <우리의 몫, 목소리>에 앞서 순차적으로 공개됩니다.

▲ 파티마 이삭 님 ⓒ사단법인 아디
"혼자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힘들어요. 로힝야 민족을 위해 저도 무언가를 하고 싶어요."
아디의 로힝야 활동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파티마 이삭 님입니다. 2007년 한국 땅을 밟은 후, 3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불안정한 난민의 삶을 지나 2021년 당당히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교육 기회가 박탈된 로힝야 여성 중 언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소수의 ‘운 좋은 사람’이기에 그 행운을 자신의 민족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한 주체적인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2017년에 아디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 파티마 님은 로힝야어 선생님으로, 로힝야의 식탁과 쿠킹클래스의 요리사로, 로힝야 나우 토크쇼의 연사로, 씨리얼 유튜브의 인터뷰이로, 다양한 역할을 통해 아디가 국내에 로힝야를 알릴 수 있게 도와준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말하며 세상 곳곳에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파티마 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디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2017년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나요?
2017년 참여연대 건물에서 열렸던 로힝야 학살 규탄 간담회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였고, 아디의 이동화 활동가가 먼저 나와 남편에게 연락을 줬어요. 아디와는 로힝야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만났어요. 아디가 아니었다면 한국 사람들은 절대 로힝야에 대해 몰랐을 거예요. 아디가 없다면 내가 혼자 얘기한다고 누가 들어줄까요? 그렇기에 아디는 알려주고, 노력하고, 사람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했어요.
왜 로힝야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으셨나요?
사람에겐 누구나 자유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 로힝야에게는 자유가 없어요. 이동할 자유, 공부할 자유, 표현할 자유 등 그 어떠한 자유도 없어요. 로힝야인들은 한 지역에만 가만히 있어야 했어요. 개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우리 로힝야는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얀마에서 보내신 어린 시절과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당시 로힝야인들의 삶은 어땠나요?
내 부모님은 미얀마 시민권도 발급받아 당연히 미얀마 시민으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낀 뇻(Khin Nyunt) 총리 집권 이후에는 로힝야인에 대한 시민권 박탈과 외국인 취급이 시작되었고, 로힝야인은 사업도 시작할 수 없었고 경제 활동이 제한되기 시작했어요.
내 부모님 세대에는 완전한 자유까진 아니어도 이 정도의 탄압과 혐오가 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내 둘째 남동생이 태어났던 해, 나의 아버지도 군부 비밀경찰에 체포되었어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이슬람 무장단체와 연루되었다는 혐의였는데, 실제로는 로힝야 등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적법하지 못하게 체포되었어요. 당시에는 군부 비밀경찰에 체포되면 살아돌아올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막내 남동생이 태어난 해에 또 다시 체포되었어요. 이때에는 체포 후 3일만에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비밀경찰에게 구금되어 협박을 받았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지금 미얀마는 어떤 상황인가요?
시트웨에 친척 몇 명이 살고 있어요. 들어보면 요즘 라카인 주에선 아라칸군(Arakan Army, AA)이 로힝야인들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여전히 불안하게 살고 있다고 해요. 특히 어린 로힝야 여성들이 주 납치 대상이고, 이들에게는 교육 기회도 제한적이다보니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거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워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난민캠프 상황도 들어보면 많은 로힝야 여성들이 결혼 후 이혼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SNS에서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로힝야인들의 소식도 접하는데 매번 마음이 안타까워요.
2007년 한국에 오신 이후의 정착 과정은 어떠셨나요?
2004년 전까지는 시트웨에 살고 있었고, 2004년부터는 양곤에서 살았어요. 그리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2007년에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미얀마에 있을 때에는 항상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어요. 내 부모님은 시민권이 있었지만, 나는 시민권도 없었고, 누군가 나를 잡으러 올까봐 항상 무서웠어요. 반면, 한국은 부유하고 안전한 나라이기에 안심이 돼요. 물론 고향에 대한 생각이 나기도 해요.
나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왔다보니 사는 곳 근처에 시장이나 마트, 병원, 약국이 있어도 있는 줄 몰라서 많이 헤맸었어요. 아이들이 아파도 근처에 병원, 약국이 있는 줄도 모르고 멀리에 있는 병원과 약국으로 가곤 했어요.
2017년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로힝야를 거부하는 미얀마인들의 시위를 마주하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들은 현장에 가 봤나요?”, “우리 로힝야인에 대해 뭘 아나요?” 실제로 내가 일하고 있었을 때에도 한 미얀마 승려가 찾아와 로힝야인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한 적이 있어서 실제로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러자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국내 거주하는 미얀마인들도 한국이라는 타지에서 생활하다보니 외국인이라는 차별과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왜 함께 연대하지 않고 그렇게 혐오하는지,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면 되는데 어째서 그러한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아디와 함께 했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로힝야 식탁과 쿠킹클래스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요리할 때 고추를 크게 잘라서 넣고 매우면 빼서 먹어도 된다고 말했었는데, 참여했던 분들이 고추를 작게 잘라 넣고 그대로 먹고선 “로힝야 음식이 이렇게 맵나요?”라고 물어보던 게 재밌었어요. 로힝야 음식은 원래 그렇게 맵지 않거든요.
로힝야 문화를 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정말 뿌듯했어요. “로힝야 사람들은 뭐 먹어요?”라는 질문에 로힝야 음식을 소개하고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 2024년 로힝야 쿠킹클래스에서 레시피를 설명하는 파티마 님 ⓒ사단법인 아디
아디와 활동하면서 선생님, 요리사, 연사 등 다양한 역할을 맡으셨는데요, 파티마 님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역할이건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는 성격이에요. 로힝야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더욱더 “나는 로힝야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파티마 님에게 아디는 어떤 의미인가요?
아디는 “로힝야”다. 아디가 있어서 로힝야를 알릴 수 있었어요. 아디가 없으면 누가 로힝야를 알릴 수 있었을까요? 나 혼자만 잘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로힝야인들은, 특히 로힝야 여성들은 독립적이고 생활력이 강해요. 우리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만 못 하게 만들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거예요. 미얀마 군부는 특히 로힝야 여성들의 교육과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어요.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나는 아디를 통해서 알릴 수 있었어요. 나는 지금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고 세상에 있는 수많은 로힝야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어요. 그렇기에 나는 지금의 편안함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로힝야에 대해 알려왔고 앞으로도 알릴 거예요.
팔레스타인 연대집회와 가자 지구의 전쟁 피해자를 위한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의 의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 로힝야 사람들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아요. 내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 쓰는 돈, 예를 들면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처럼, 이런 돈을 잘 모아서 전쟁의 피해생존자들에게 기부하고 있어요. 내가 나를 위해 쓰는 것보단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기분도 뿌듯해요.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닐까요? 내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나눠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에요.
아디와 함께하기를 망설이는 분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로힝야에 연대하고 싶은 한국 시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가 한 선행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와요. 내가 한 악행 또한 반드시 나에게 돌아와요. 아디에 후원하는 것이 작은 일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로 인해 어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로힝야 사람들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전달해줘도 좋아요. 로힝야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억압 받아왔기에, 로힝야 사람들에게 “우리는 너희 옆에 있어”라는 말 한 마디도 큰 힘이 돼요. 나도 한국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 한국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나에게 위로해주는 한 마디만으로도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어요. 로힝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로힝야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공감해주고, 로힝야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목소리도 정말 큰 힘이 돼요. 우리 로힝야 사람들은 힘이 없는데,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옆에 있어준다는 것은 힘이 되어요.
파티마 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아디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파티마 님의 이야기를 곱씹었습니다.
“나에게 아디는 ‘로힝야’다.”
파티마 님이 망설임 없이 채워 넣은 문장을 통해, 지난 10년 동안 한국과 현장을 오가며 달려 온 아디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정말 현장에 도움이 되고 있을까?’ 활동가라면 마음 한구석에 늘 품고 있던 고민에 대해, 파티마 님은 우리가 미처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가장 확신에 찬 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디가 지난 10년간 정말 필요한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파티마 님처럼 세상 곳곳의 고통에 연대하는 동료들이 있기에 아디의 10주년이 가능했습니다.
로힝야와, 팔레스타인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아디의 여정에 동참해 주시겠어요?
<목소리로 이어진 10년>은 사단법인 아디의 10주년을 맞아 여정을 돌아보기 위한 인터뷰 기록입니다.
아디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 아디의 곁을 지켜온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아디와 연결된 사람까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이야기를 모아 아디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그려가고자 합니다.
인터뷰는 아디의 10주년 행사 <우리의 몫, 목소리>에 앞서 순차적으로 공개됩니다.
▲ 파티마 이삭 님 ⓒ사단법인 아디
아디의 로힝야 활동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파티마 이삭 님입니다. 2007년 한국 땅을 밟은 후, 3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불안정한 난민의 삶을 지나 2021년 당당히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교육 기회가 박탈된 로힝야 여성 중 언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소수의 ‘운 좋은 사람’이기에 그 행운을 자신의 민족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한 주체적인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2017년에 아디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 파티마 님은 로힝야어 선생님으로, 로힝야의 식탁과 쿠킹클래스의 요리사로, 로힝야 나우 토크쇼의 연사로, 씨리얼 유튜브의 인터뷰이로, 다양한 역할을 통해 아디가 국내에 로힝야를 알릴 수 있게 도와준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말하며 세상 곳곳에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파티마 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아디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2017년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나요?
2017년 참여연대 건물에서 열렸던 로힝야 학살 규탄 간담회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였고, 아디의 이동화 활동가가 먼저 나와 남편에게 연락을 줬어요. 아디와는 로힝야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만났어요. 아디가 아니었다면 한국 사람들은 절대 로힝야에 대해 몰랐을 거예요. 아디가 없다면 내가 혼자 얘기한다고 누가 들어줄까요? 그렇기에 아디는 알려주고, 노력하고, 사람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했어요.
왜 로힝야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으셨나요?
사람에겐 누구나 자유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 로힝야에게는 자유가 없어요. 이동할 자유, 공부할 자유, 표현할 자유 등 그 어떠한 자유도 없어요. 로힝야인들은 한 지역에만 가만히 있어야 했어요. 개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데, ‘우리 로힝야는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얀마에서 보내신 어린 시절과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당시 로힝야인들의 삶은 어땠나요?
내 부모님은 미얀마 시민권도 발급받아 당연히 미얀마 시민으로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낀 뇻(Khin Nyunt) 총리 집권 이후에는 로힝야인에 대한 시민권 박탈과 외국인 취급이 시작되었고, 로힝야인은 사업도 시작할 수 없었고 경제 활동이 제한되기 시작했어요.
내 부모님 세대에는 완전한 자유까진 아니어도 이 정도의 탄압과 혐오가 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내 둘째 남동생이 태어났던 해, 나의 아버지도 군부 비밀경찰에 체포되었어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이슬람 무장단체와 연루되었다는 혐의였는데, 실제로는 로힝야 등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적법하지 못하게 체포되었어요. 당시에는 군부 비밀경찰에 체포되면 살아돌아올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막내 남동생이 태어난 해에 또 다시 체포되었어요. 이때에는 체포 후 3일만에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비밀경찰에게 구금되어 협박을 받았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지금 미얀마는 어떤 상황인가요?
시트웨에 친척 몇 명이 살고 있어요. 들어보면 요즘 라카인 주에선 아라칸군(Arakan Army, AA)이 로힝야인들을 공격하고 납치하는 등 여전히 불안하게 살고 있다고 해요. 특히 어린 로힝야 여성들이 주 납치 대상이고, 이들에게는 교육 기회도 제한적이다보니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내거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워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난민캠프 상황도 들어보면 많은 로힝야 여성들이 결혼 후 이혼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SNS에서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로힝야인들의 소식도 접하는데 매번 마음이 안타까워요.
2007년 한국에 오신 이후의 정착 과정은 어떠셨나요?
2004년 전까지는 시트웨에 살고 있었고, 2004년부터는 양곤에서 살았어요. 그리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2007년에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미얀마에 있을 때에는 항상 두려움에 떨면서 살았어요. 내 부모님은 시민권이 있었지만, 나는 시민권도 없었고, 누군가 나를 잡으러 올까봐 항상 무서웠어요. 반면, 한국은 부유하고 안전한 나라이기에 안심이 돼요. 물론 고향에 대한 생각이 나기도 해요.
나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왔다보니 사는 곳 근처에 시장이나 마트, 병원, 약국이 있어도 있는 줄 몰라서 많이 헤맸었어요. 아이들이 아파도 근처에 병원, 약국이 있는 줄도 모르고 멀리에 있는 병원과 약국으로 가곤 했어요.
2017년 한국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로힝야를 거부하는 미얀마인들의 시위를 마주하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들은 현장에 가 봤나요?”, “우리 로힝야인에 대해 뭘 아나요?” 실제로 내가 일하고 있었을 때에도 한 미얀마 승려가 찾아와 로힝야인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한 적이 있어서 실제로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러자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국내 거주하는 미얀마인들도 한국이라는 타지에서 생활하다보니 외국인이라는 차별과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왜 함께 연대하지 않고 그렇게 혐오하는지,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면 되는데 어째서 그러한 태도를 보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아디와 함께 했던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로힝야 식탁과 쿠킹클래스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요리할 때 고추를 크게 잘라서 넣고 매우면 빼서 먹어도 된다고 말했었는데, 참여했던 분들이 고추를 작게 잘라 넣고 그대로 먹고선 “로힝야 음식이 이렇게 맵나요?”라고 물어보던 게 재밌었어요. 로힝야 음식은 원래 그렇게 맵지 않거든요.
로힝야 문화를 전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정말 뿌듯했어요. “로힝야 사람들은 뭐 먹어요?”라는 질문에 로힝야 음식을 소개하고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 2024년 로힝야 쿠킹클래스에서 레시피를 설명하는 파티마 님 ⓒ사단법인 아디
아디와 활동하면서 선생님, 요리사, 연사 등 다양한 역할을 맡으셨는데요, 파티마 님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역할이건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는 성격이에요. 로힝야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더욱더 “나는 로힝야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파티마 님에게 아디는 어떤 의미인가요?
아디는 “로힝야”다. 아디가 있어서 로힝야를 알릴 수 있었어요. 아디가 없으면 누가 로힝야를 알릴 수 있었을까요? 나 혼자만 잘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로힝야인들은, 특히 로힝야 여성들은 독립적이고 생활력이 강해요. 우리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만 못 하게 만들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거예요. 미얀마 군부는 특히 로힝야 여성들의 교육과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어요.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나는 아디를 통해서 알릴 수 있었어요. 나는 지금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고 세상에 있는 수많은 로힝야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어요. 그렇기에 나는 지금의 편안함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로힝야에 대해 알려왔고 앞으로도 알릴 거예요.
팔레스타인 연대집회와 가자 지구의 전쟁 피해자를 위한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의 의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 로힝야 사람들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아요. 내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 쓰는 돈, 예를 들면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처럼, 이런 돈을 잘 모아서 전쟁의 피해생존자들에게 기부하고 있어요. 내가 나를 위해 쓰는 것보단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쓰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기분도 뿌듯해요.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닐까요? 내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나눠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에요.
아디와 함께하기를 망설이는 분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로힝야에 연대하고 싶은 한국 시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가 한 선행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와요. 내가 한 악행 또한 반드시 나에게 돌아와요. 아디에 후원하는 것이 작은 일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로 인해 어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로힝야 사람들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전달해줘도 좋아요. 로힝야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억압 받아왔기에, 로힝야 사람들에게 “우리는 너희 옆에 있어”라는 말 한 마디도 큰 힘이 돼요. 나도 한국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 한국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나에게 위로해주는 한 마디만으로도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어요. 로힝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로힝야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공감해주고, 로힝야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목소리도 정말 큰 힘이 돼요. 우리 로힝야 사람들은 힘이 없는데,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옆에 있어준다는 것은 힘이 되어요.
파티마 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아디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파티마 님의 이야기를 곱씹었습니다.
“나에게 아디는 ‘로힝야’다.”
파티마 님이 망설임 없이 채워 넣은 문장을 통해, 지난 10년 동안 한국과 현장을 오가며 달려 온 아디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정말 현장에 도움이 되고 있을까?’ 활동가라면 마음 한구석에 늘 품고 있던 고민에 대해, 파티마 님은 우리가 미처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가장 확신에 찬 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디가 지난 10년간 정말 필요한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파티마 님처럼 세상 곳곳의 고통에 연대하는 동료들이 있기에 아디의 10주년이 가능했습니다.
로힝야와, 팔레스타인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아디의 여정에 동참해 주시겠어요?